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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s
(Unless you’re swimming in free time, I wouldn’t suggest reading it with too much at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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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가 전도된다.
세상이 무너진다.
하늘에 구멍이 나고, 땅에도 구멍이 난다.
천장이 뚫리고, 바닥도 뚫려 버렸다.
이제 하늘도 땅도, 천장도 바닥도 모두 하나가 된다.

하루는 일주일이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하루 안에는 예닐곱의 오르내림, 무너짐와 일어섬이 있다.
하루는, 통제 할 수 없는 예닐곱의 천지개벽, 기복으로 하루이자 하루 아닌 갈라진 시간이 된다.
갈라짐으로, 시간이 갈라지며, 그렇게 일주일이 하루가 되고, 일년도 하루가 된다.
어찌 할 도리도 없이 갈라지는 하루는, 일년이 되고, 어느샌가 일주일이 된다.
그렇기에, 그다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숨김과 드러냄>

오지 않을 내일이, 그 내일이라는게 무엇인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분명 오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때까지 하는 마지막 인사처럼
기약 없이 맞이하고, 내어주고, 만들어낼 내일은 올라가야 한다.
지면地面보다 높은 곳에.
올려다 볼 수 있게.
기념비이며 허물이며 껍데기인 것이 동시에 기념비이자 허물이자 껍데기인 것을
본인으로부터 나게 된, 본인은 모를 수 있을 테지만, 본인과 같은 기원을 지니는 것을 발판 삼아.

오지 않을 내일에 대해 써내려 가며, 그렇게 지은 것은 보다 높은 곳에서 보여져야 하며
그 자체만으로는, 오지 않을 내일에 대한 나의 소고가, 그것만으로는 오롯하다 할 수 없기에
구멍을 공유하는 무엇이 함께 해야만 한다.
그 무엇은 겉으로는 하얄 테지만
하나되며 구멍이 구멍이 아니게 될, 그 구멍으로 보이는 것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그것이, 속으로는 미처 충분히 해결하지 못한
그런 것이어야 할 것만 같다.

오지 않을 내일에 대한 소고.
그것을 지으며 충분치 못했고, 해결되지 않은, 마땅히 이어져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구멍이자 구멍이 아닌 구멍 너머로 보여져야 하는가.
무엇이 그 하얀 외피 속에, 구멍이자 구멍 아닌 구멍 너머에 있어 마땅한가. 
무엇이 겉과는 다른 방향으로 쓰여지고, 지어져야 하는가.  
속에 지어진다는 것은 숨기는 것인가
아니면 드러내고는 싶으나 동시에 숨기고 싶은 양가적인 심리로 말미암은
은근히 보여주고 드러내긴 하나, 한편으로는 조심스레 한발 물러서는, 그런 숨김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견고한 외피 내부에는 드러내고자 하는 동시에 조심스러운 마음이
본인조차 확신이 없을, 양가적인 심정에서 비롯하고, 양가적임을 지니는 것이 자리해야 마땅할 테다.
작품인지 발판인지, 작품의 일부인지 그 연장인지, 별개의 것인지, 일련의 구분이 아리송할
심지어는 유심히 들여다 보야야만 발견하게 될, 구멍이자 구멍 아닌 구멍 너머의 은밀한 내부일 것이기에.
그곳은 그런 자리, 그런 공간, 그런 지면地面이자 지면紙面일 것이기에.

누가 뭐라 하든, 그곳에는 그러한 것이 있어야만 한다.
그 속의 바닥은, 이제 방향이 의미가 없어진 지면이다.
외피의 천장에서 바다가 흘러 흘러, 내부의 바닥에 고이고야 만다.
고인 웅덩이는 이제 다시 바다가 된다.
다시 바다가 될 웅덩이는, 구멍 사이 들어오는 희미한 빛으로 바다가 된다.
일주일도, 하루도, 내일도, 어제도, 계절도, 이제 의미를 잃었다.
어떤 때는 눈이 오고, 또 다른 때는 비가 왔을 것이다.
바람도 불고 해가 뜨고 지기도 했을 것이다.
다만 모든 것이 되었다가 아니되기도 하며 이어지고 어긋나며 흘러 고여버린
속의, 방향을 잃은 바닥

그 웅덩이는 어두운 공간에 갇힌 일그러진 태양의 모양새로, 그렇게 바다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현재이고, 과거이자 미래이며 꿈이자 꿈 아닌
현재도 아니고 과거도, 미래도, 꿈도 무엇도 아닌 지금
갈라진 시간을 경유하며 고여버린 웅덩이는 구멍 너머 희미하게, 빛으로, 소금으로, 태양의 일그러짐으로, 바다로
언젠가 가깝게, 또 멀게 눈을 속이곤 하던 것은 이제 의미를 잃고
아로새긴 무늬가 되어, 진창이 되어
한겹 아래 방향을 잃어버린 하루들을 품는듯 숨기는듯
그렇게 지어지는 것이다.




꼭 과거의 나를 보는 것만 같은, 공교로운 사람이 있다.

작업만 하는 삶은 온/오프가 되지 않는 기괴한 삶이다.
분명 내게는 직업으로써, 작업은 일을 하는 것일 테다. 
다만 그렇다고 작업이, 작업에 들인 시간이, 통상적으로 어떤 직업 혹은 일이라 함은 응당, 그 시간과 노동과의 교환으로 얻게되는 돈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온/오프가 명확하지 않고, 시간과 생명을 내어주긴 하나 합리적인 교환이 성립되지 않는 일.
틀어박혀서 오로지 ‘작업만’ 하는 삶은 고행을 자처하는 것임을 이제서야 자각한다.
작업만 한다고, 마냥 고립되어 작업만 한다고 해서 결과물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닐 터.
나름의 큰 용기, 결심으로 다시 과거의 연을 마주해 과거와 같은 일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곳에는 꼭 과거의 나를 똑 닮은, 여러 방면에서 교집합을 이루는 공교로운 사람이 있다.
그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공교로운 그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스물하나에서부터 지금 스물여덟의 내가 있기까지의
당장에 적절한 표현들로 써내려 갈 수 만은 없는
쉽게 형용할 수 없는
그저 ‘많은 것들'이라 뭉뚱그려 적을 수 밖에 없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 무책임한 ‘많은 것들'이라는 수식에 조금이나마 설명을 보태자면
그것은 아마 사람과 시간, 장소들이 마구 뒤엉킨, 그런 공교로움일 테다.




<애너그램/토톨로지_갈라짐-잔상-웅덩이>

바다가 갈라진다.
언젠가 바다가 갈라지는 듯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암초인지 땅인지, 해변의 길인지 분명치 않은
마치 하얗게, 소복히 쌓인 눈같은
시린 동시에 한켠에는 온기를 품은
그런, 겨울의 계절감으로 내게 왔다.
하얗고 시린 온기의 계절감으로, 그렇게 바다는 갈라졌다.

겨울의 계절감이 바다를 갈라놓은 뒤
갈라진 틈 새로 산이 솟아났다.
어느해 겨울의 잔상처럼, 그렇게 솟아오른 산을 본 적이 있다.
그 산은 영화 속 한 장면이었는지, 벽지의 패턴,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모양새이기도
산은, 언젠가의 숲 속 나무와 흙이 뿜어내는 내음을 품은 장면이었는지
혹은, 그저 어느해 여름들의 기억이, 엉망으로 뒤엉킨 모양새일런지 모르겠지만
작열하는 태양과 하늘은, 분명 그 뜨거운 열기로, 또 언제는 불가항력처럼 쏟아져 내리는 빗물로, 눈물로, 땀방울로, 흠뻑 젖게 만들었다.
언제부터 였는지 알 수 없이, 그렇게 불현듯, 듬성듬성한 모양새로 생겨난, 생애의 공백.
뜨겁고 축축하게, 산과 하늘은 그렇게 갈라짐의 잔상으로 남았고 
공교롭게도, 뜨겁고 축축한 그것들로 인해
듬성듬성 공백을 지닌채로, 언제부터인가 멈춰 있던
던해져 버린 시계가 갈라졌다.

바다가 갈라지고, 산이 솟아나며, 하염없이 쏟아내어진 것들은 웅덩이로 다시 바다가 되었다.
시리고, 따뜻하고, 뜨겁고, 축축했던 것들은, 이제 진창과 같은 웅덩이에 비춰진 것으로 밖에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진창 속에 뒤엉킨 흐릿함으로나마 이전의 것들을 본다.
갈라지며 흐릿해진 것.
갈라짐으로 흐릿해진 그곳에서는, 이제 산이, 땅이 하늘이고
바다가 땅이, 하늘이 되고
천지가 전도되는 듯, 계절이 역행하는 듯
내던져진 이곳의, 주어진 이치에 어긋나는 모양새로
여전히 곳곳에 구멍이 난 시간이긴 하지만
그것이나마 갈라짐으로 인해
어떤 내일이 오지 않을 내일이건, 또 다른 내일이건
그리 됨으로 인해, 그러한 모든 구분은, 그닥 의미가 없을 수 있게 되었다.




<방향이 할 수 있는 것>

읽기 위해 쓰는 글
읽히기 위해 쓰는 글
본인이 읽기 위해 쓰는, 짓는 글
타인에게 읽히기 위해 쓰는, 짓는 글
두 글은 쓰여지는 방향이 다르다.

문신에 한해서는 물리적으로, 피부에 새겨지는 방향이 다르다.
일기, 수필, 소설, 작업노트, 단상...
지면紙面에 쓰여지는 여타의 경우 글이 저자의 내부에서부터 외부를 향하거나, 혹은 더 깊이 침잠하거나
어디로 향하는지 비가시적인, 다른 방향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읽히기 위한 글은 물이 방류되는 모양새
글은 방류되어, 분출되어 밖의 세상과 마주할 것이며,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이를 마주할 테다.
읽기 위한 글이라 함은, 물이, 물 속으로 침잠하고 잠수하는 모양새
글이 저의 속으로 가라앉고 침잠하여, 스스로를 다시금 마주할 것이며, 그렇게 또 다른 본인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왼쪽 다리에는 많은 문구, 글이 새겨져 있다.
스스로 보고, 다짐하고, 되뇌이기 위한 것들.
어디까지나 읽기 위해 쓴 글이기에
혹자의 시선에서는 상하좌우의, 모든 방향이 뒤집힌 것들.
허면 작업은, 작업이 진정 어떤 언어라 한다면
도상이 그려지는 방향. 형상이 만들어지는 방향. 보여지는 방향
그 방향들로 할 수 있는 것 역시, 분명 있을 것만 같다.

읽기 위해 그리거나 만드는 부분
읽히기 위해 그리고 만드는 부분
그런 규칙을 만들 수 있을 것만도 같다.



애너그램과 토톨로지_갈라짐/폭죽/웅덩이/잔상

갈라진다.
시간이 갈라진다.
시간이 갈라지고, 폭죽이 쏘아 올려진다.
폭죽이 갖가지 색으로 터지면, 하늘은 일순간 낮처럼 밝게 빛나고.
온갖 빛깔들로 쏘아올려 졌던 것들은 결국 떨어지기 마련이고.
일순간 터지며, 퍼지며, 흩어졌던 것들은 하강의 운동으로, 다시 모여, 고여, 웅덩이로.
그렇게 진창으로 고인 웅덩이는 이전의 것들을 잔상으로나마 비추어 보여주고.
끝끝내 그 잔상마저, 언젠가 발했을 저의 빛을 다하고 말면
종과 횡으로, 상승과 하강의 알 수 없는 운동으로
다시금 그 갈라짐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야 말고.
갈라지는 가운데, 알 수 없이 놓여지고야 말고. 
 


시간을 본다.
갈라짐을 본다.
시간이 갈라진다.
시간이 갈라짐을 본다.

하늘이 땅으로
땅이 하늘로
산이 하늘로
천지가 전도되는 것

땅인지 하늘인지
산인지 바다인지
산이자 바다이며 땅인 하늘이 두 개의 하늘로 갈라진다 



갈라짐.  웅덩이.  폭죽.  잔상.
갈라짐.  폭죽.  웅덩이.  잔상.
갈라짐.  잔상.  웅덩이.  폭죽.
갈라짐.  잔상.  폭죽.  웅덩이.

애너그램/어구전철語句轉綴
애너그램/갈라짐/웅덩이/폭죽/잔상
애너그램_갈라짐/잔상/웅덩이/폭죽
애너그램_갈라짐, 잔상, 웅덩이, 폭죽

애너그램.  애너그램이다.  애너그램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애너그램
토톨로지
애너그램과 토톨로지.
항상 참이 될 수 밖에 없는 애너그램/어구전철.
어쩌면 말장난

내일을 복기하며, 유사적 언어로서 유효함을 재귀적으로 검토하며
그렇게 출발한 것이기에.
내일이 항상 참이 될 수 있게끔.
내일이 그저 말장난이 아닌, 토톨로지와 같은 애너그램이 될 수 있게끔. 
ldrlrlr이 또 다른 내일이 될 수 있게끔. 





“내일을 복기”하며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 다가올 필연적인 소멸을 앞당겨 경험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는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무엇도 부패하지 않는 순간들이 이따금 찾아온다.
곧바로 한층 더 불투명해진 세계를 마주할지라도, 그때의 우리는 자유로운 지속을 누린다. 문민이 짓는 〈내일〉은 그런 시간을 품으며 지금이라는 유일한 시간을 다시 묻는다.
내일의 인사는 내일 하는 인사가 아니라 내일이 올 때까지 하는, 지금의 인사다.






풍경.
내가 풍경을 그린다는데
내가 그리는 것이 풍경일까?
내가 그리는 것이 과연 풍경일까?
내가 과연 ‘그리는' 것일까?




내일 no.15_내일을 복기한다는 것은 Tomorrow no.15_What it means to revisit tomorrow

내일 no.16_오지 않을 내일에 대한 소고 Tomorrow no.16_Notes on a tomorrow that may never come

내일 no.17_오지 않을 내일, 또 내일 Tomorrow no.17_A tomorrow that may never come, tomorrow again

내일 no.18_오지 않을 내일, 그리고 내일 Tomorrow no.18_A tomorrow that may never come, and then tomorrow

내일 no.19_오지 않을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내일 Tomorrow no.19_A tomorrow that may never come, and tomorrow, and tomorrow

내일 no.20_오지 않을 내일과 또 다른 내일 Tomorrow no.20_A tomorrow that may never come, and another tomorrow

내일 no.21_또 다른 내일, 그리고 잔상들 Tomorrow no.21_Another tomorrow, and traces

내일, 내일, 내일, 내일, 내일, 내일, 내일, 내일, 내 일, 내일 ... 또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내일, 내일, 내일, 또 내일, 내일, 또 내일, 또, 또 내일.
그리고, 또 다른 내일



<내일_작업노트_260714>

내일

내일은 누구도 본 적 없으나, 숨 쉬고 사는 모두가 찾아오리라 믿는 약속이다. 존재한 적 없지만, 늘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내던져진 삶은 수많은 사건과 환경이 얽혀 있는 아이러니한 곳이다. 그 속에서 나는 거울을 본다. 날 때부터 주어진 이름의, ‘나’라는 인칭대명사가 지칭하는 것을 본다. 그때 느끼는 것은 왠지 모를 위화감이다.
책을 보고, 미디어를 보고,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 ‘본다’. 본다는 것은 때에 따라 관점이 될 수 있고, 생각이 될 수도 있고, 시지각이 될 수도 있다.
‘본다’는 하나의 단어가 실로 그 이상의 것들이 될 수 있듯, 불분명한 무엇을 그럴듯한 수사로 정연하게 하는 것은 앞선 위화감을 가리는 편리한 방식일 테다. 어쩌면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 혹은 본다고 믿는 것은 눈과 뇌의 환영 위에 세워진 불완전한 가정일지 모른다. 내게 작업은 이미 주어진 것들에 대한 의구심에서 비롯해, 온몸으로 자문자답하며 내가 속한 이곳과 나에 대해 탐구하는 ‘보기’의 방식이다.

지면紙面은 지면地面이다. 종이는 내 작업이 서는 땅이자, 그 위에 무언가를 짓는 자리다. 재료들로 스스로를 확인하는 과정인 동시에, 공고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손과 몸으로 지지체를 깎아 만들고, 그 뼈대 위에 닥 섬유를 쌓고 더듬어, 일련의 흔적이 요철로 남은 종이를 만든다.
울퉁불퉁한 그 위에 빛을 그린다. 일상, 웹, SNS를 망라해 불특정한 관찰자가 포착한 장면을 수집하고, 빛이 대상의 윤곽을 망막에 맺어 드러내는 방식처럼 그 윤곽과 모여드는 빛을 그린다.
종이의 층을 쌓고 상이한 장면을 겹쳐 그리기를 반복한다. 헤집어진 종이의 층위 가운데 남는 어렴풋한 흔적들. 서로 다른 출처-시점-맥락의 장면들은 화면 속 교차하는 도상들로 한데 뒤엉킨다.


시간의 흐름이 켜켜이 퇴적된 듯한 덩어리. 금속성 템페라 Metallic tempera(금속 분말을 과슈, 호분 등의 안료와 함께 아교에 개어 사용하는 재료)로 그려낸 이 덩어리는 살아 있는 것처럼 산화하며 시간을 육화하는 듯하지만, 뭉그러지며 한데 압축된 것은 그를 가장한 별개의 사건들이다.

그로부터 지지체를 떼어낸다. 언뜻 두껍고 견고해 보이지만 속이 빈 채로 껍데기만 남은 것. 공간에 서 있는 이 껍질, 화면은 어느 한 자리에서 온전히 볼 수 없다.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기에, 관객은 이동하며 자신의 시선이 향할 곳을 선택해야 한다.

도상-표면-공간-감상을 재료 삼아 이미지로 조합한다. 그렇게 만들어낸 것을 통해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볼 것인가.
<내일>은 보는 행위를 통해 ‘지금 여기’가 품은 아이러니를 되묻는 작업이다.





거꾸로 내리는 비.
하강이 아닌 상승의 운동.
그렇게 중력의 끌어당김에 저항하는 비가 있다면
그런 비가 가능하다면
그 모양새는, 인공의 동력원에 의해 솟는 분수와 같은 것 보다는
아마 힘겹게 허공을 오르려는 듯한, 그런 애처로운, 혹은 위태로운 모양새에 가까울 것이다.
상승을, 그런 모양새를 기꺼이 자처하는 비.
비가 거꾸로 내린다 함은 그러할 것만 같다.



우리.라는 이름은 파도처럼 사라지고

비움
구멍
결핍
모자람
더함
채움
충만함
충족
공허
궁기
갈증
공허
Hunger/Thirst/Ever



<상승과 하강>

시간이 갈라진다.
갈라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 갈라짐은 무엇인가.
내 안에 살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갈라지고
갈라진 것들이 다시 엉겨붙고
갈라진 틈새.
그 틈새로 다른 무엇이 비집고 들어가버리는
그런 갈라짐인가.
갈라짐은 무엇인가.
그 갈라짐을 메우는 것은 무엇인가.
갈라짐. 결핍. 기스. 나이테.  

갈라짐 사이로 보이는 것.
갈라졌기에 보이게 된 것.
갈라졌기에, 비로소 드러날 수 있는 것.
갈라졌기에, 그 갈라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드러낼 수 있는 것.

갈라짐 가운데에는, 메말라 버렸을 수도 있을
혹여, 어쩌면 다시금 생기로 채워질 수도 있을.
갈라짐 가운데에는 그러한 것들이 있어야 할 법하다.
미약하더라도.
흐릿하더라도.
충돌하고, 이어지고, 뒤엉키며.
그렇게 갈라짐은, 흉진 결핍은 생애의 몫을 다하고자 함에 비롯한
아름다운 흔적으로, 공백으로 남아
갈라졌기에만이 품을 수 있는 것들로 채워질 테다.  

외줄타기.
살얼음.
계절.

뿌리 없는 발.
그래서 더는 상처받지 않는 발.
그래서 상처를 모르게 된 발.

갈라짐 사이로 생겨난 웅덩이들이 필요하다.
비가 오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근래의 날들처럼
언제 내려 고인 것인지 알 수 없을 빗물.
누군가 남몰래 삼키고, 하염없이 흘렸을 눈물.
치열하게 살아낸 나날의 땀방울.
그런 것들이 고인 웅덩이.
갈라짐 가운데에는 그런 웅덩이가 필요하다.
상승과 하강으로.
종과 횡으로.

그렇게, (불)분명한 운동의 양상으로 고이게 될.
웅덩이는, 어긋난, 어긋나버린 많은 것들은 덮어줄 것이다.
웅덩이는, 어긋남과 갈라짐을 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발이 닿지 않게, 젖지 않게 피할 법한 웅덩이.
담배꽁초, 쓰레기, 나뭇가지, 이파리, 모래 알갱이.
많은 것들이 잔여물이 되어, 진창이 되어 젖은 웅덩이.
여타의 경로들을 아우르는 어떤 하루의, ‘보기’의, 생生의 잔여물.
그들 단신으로는, 도무지 오롯하다고는 할 수 없을, 파편으로 남을 것들.
그것들은 웅덩이로 말미암아 하나될 수 있을 것이다.

몇 분만에 이내 젖어들어 축축해진 바짓단이 다리를 적시는 것을 본다.
문득 몇 번의 비 내리는 날들이 있을지 손으로 꼽아보았던 순간들이 아스라이
여전히 비가 내리고 나면 기어코 젖어들고야 마는 저이지만은
그럼에도 지금껏 살아가고 있음은
저근덧 지나가버리는 생의 그 어느 대목에서 내가 울었는지
이제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음으로 인한 것임을
어긋남과 이어짐.
검은 것.
검게 되버린 것.
검게 남아버린 것.
검기에, 비로소 볼 수 있게 된것.

삶에는 어찌할 도리도 없이 이미 결정된 채로 다가오는 것들이 대부분인 셈이니까
앞엔 모든 것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게 어긋나고 이어지며 어찌할 도리도 없이 다가오는 것들.
산과 바다라는, 대립적 구도마저 종과 횡으로, 갈라짐 가운데 어긋남으로, 이어짐으로
하나 아닌 하나로 다가오게 만들어 버리는 것.

하나 아닌 하나.
하나됨과 동시에 하나될 수 없는
어딘가 아린 것.
부서질 듯이 위태로운 것.
아리고, 부서질 듯 위태롭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
생각하자면 어딘가 서럽고 두렵고 쓸쓸한 것.

그리하여 쓰고 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
혹은 구태여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그저 그뿐인 것.
 



<IMAGE HANDLING PRACTICE 23_인디언식 기우제, 인디언식 기우제>

1. 보관 환경(실기실)매우 습함_표면상 곰팡이는 아님. 추가 부식 가능성 아예 없진 않으나 표면상 박락에 가까움.

2. 달력_달력 위 덮은 종이 레이어(물풀+닥섬유 혼합물)_닥섬유 비율 낮게 사용해 사실상 달력 위에 그려진 것
3. 해당 경우 달력(양지) 위에 그릴 때에 바인더(아교) 농도 더 강하게 했어햐 하나 기존 사용하던 아교(지그 물아교) 동일하게 사용.
4. 달력>안료>부식>안료>부식...표현 뜻대로 안되어 될 때까지 덮고 그리기 반복해, 타 작업에 비해 안료 층 두껍게 쌓인 작업. 마찬가지로 바인더 농도 문제.
4. 부식/산화제 사용 후(해당 작업은 완전 부식상태X, 부식 중간에 멈추게끔 한 것) 마감으로 전용 바니쉬(부식 중단+아크릴릭 유광 바니쉬 코팅격) 대신 홀베인 수채 바니쉬 스프레이(완전 부식 아닌 작업에 적합, 기존 화면에 영향 주지 않음) 단독 사용.
5. 홀베인 바니쉬 코팅 5회가량 진행했으나, 바인더로 처음에 제대로 올라간 것과 후처리 바니쉬로 붙어있는 것은 다른 영역.
6. 미학관 반출시 상태 확인후 반출함. 핸드캐리 과정에서 가해진 외부 충격들.
7. 종합적으로 바인더/바니쉬 접착 및 코팅 강도 문제일 것으로 사료됨.






1. 닥죽을 직접 만들어 작업하시게 된 계기, 종이를 사용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직접 종이를 만들어 작업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려면 우선 ‘문신'에 대해 얘기를 해야할 듯 합니다. 저는 작업을 하기 이전에 미술을 처음 시작한 계기이기도 했던 문신을 5년 가량 업으로 삼았습니다. 제 경험상 문신은 ‘작업’과 교집합이 있긴 하나, 엄연히 클라이언트가 존재하는 서브컬쳐의 영역, 사실상 서비스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뒤따르는 한계와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 만들고픈 욕구로 인해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말씀드립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년동안 체화된 것이 제 작업을 함에 있어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여전히 어떤 의미로든 그 영향 아래에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여 처음 종이를 만들어 작업한 계기는 인체 가죽의 질감, 표면을 재현하기 위해서였고 그 중에서도 왜 종이인가 했을 때에는 친숙한 재료임과 동시에 다루기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종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 제가 제작해 사용하는 종이는 ‘종이이지만 마냥 종이는 아닌 무엇’입니다. 뒤따르는 질문, 금속성 템페라를 사용하는 이유와 같은 맥락으로 여전히 ‘종이'를 사용하는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관되는 제 가장 큰 관심사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라 단어 하나로 누군가는 역사를, 누군가는 기억을, 또 누군가는 자연과학이나 철학의 맥락에서 시간관을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배경으로, 언어가 구분하는 그것들이 제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뒤엉킨 현재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하루는, 어제는, 내일은, 오늘은, 등의 그 모든 구분이 그닥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게 시간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 그렇기에 제게 큰 흥미를 유발하는 아이러니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그것을 구분짓는 ‘언어’, ‘보기'에 대해 관심을 두고 탐구하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종이, 그리고 금속(금속성 템페라)을 사용하는 이유는 앞선 관심사의 반영입니다. 종이는 친숙하지만 분명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입니다. 주변 환경의 건습에 따라 유연해지기도, 바스라지기도 하며, 곰팡이가 피거나 삭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지체, 안료, 접착제, 마감제 등 여타의 재료를 선택할때, 창작자로서 작품의 안정성 측면에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기민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친숙함과 동시에 존재하는 취약함, 종이로 드러낼 수 있는 변화로서의 시간성이 저로 하여금 여전히 종이 앞에 서게 만듭니다.

저는 스스로의 강점을 꼽는다면 ‘연금술', 물질을 다루는 능력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제게 있어 종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본연의 친숙함과 상반되는 낯선 감각, 이를테면 암석같은, 견고한, 유물같은 등의 것으로 보여지게끔 만들기에 용이한 것이지요. 지지체를 제거해 두꺼운 동시에 얇은 표면으로 만들 수도 있는 등 양가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게끔, 아이러니하게끔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참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2. 금속성 템페라는 어떤 재료인지 생소한데요, 어떤 재료인지 일반적인 템페라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아마 통상적으로 ‘템페라'라 칭하는 것과는 결이 다를 것도 같습니다. ‘템페라'에 대해 스스로 대단히 해박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유래와 사용 원리를 살펴보면, ‘템페라’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적합하다고도 생각됩니다. 아울러 기존의 템페라와 더불어 동아시아 회화의 안료 사용법(분채, 석채 등)을 제게 맞는 방식으로 변용한 ‘템페라'라고 정리합니다. 안료/피그먼트pigment를 분말 형태의 금속 및 광물(구리, 알루미나, 카바이드, 코런덤 등)로, 용매/접착제로 아교를 택해 사용하는 것이니까요. 시판 물감들 역시 원리는 동일하니만큼, 제가 사용하는 금속성 템페라Metallic tempera 역시 대단히 특별할 것은 없을 터입니다. 안료/피그먼트pigment에 접착제가 합성수지면 아크릴 물감이 되는 것이고, 아라비아 고무액이라면 수채 물감, 오일이면 유화 물감이 되는 것처럼요. 다만 종류별 금속마다 제각각 고유의 발색이 있고, 같은 종류의 것이라도 그 입자의 크기에 따라 다른 색을 지닙니다. 더불어 재밌는 지점은 어떤 바탕에, 어떤 색의 바탕에 올라가느냐에 따라 같은 종류-입자 크기이더라도 전혀 다른 발색으로 남기도 합니다. 종류, 분말의 입자 크기 등 그 선택지들이 많은 만큼, 어떤 것들을 어떻게 조합해 사용하는냐에 따라 표현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이지요.

 금속을 안료처럼 사용했을 때에 만들 수 있는 특유의 표면이 있습니다. 이는 시판 물감들과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지점이 될 것 같습니다. 표면의 차원과 함께, 금속이라는 산화/부식하는 재료를 사용해 인위적-즉각적으로 부식시켜 한없이 오래된 것을 흉내낼 수도, 마감제를 코팅해 마땅히 산화/부식될 법한 것을 내포하는 함의만 남긴 채 변하지 않게끔 교란할 수도 있습니다. 표면상의 효과와 더불어, 앞서 종이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시간에 대한 관심사가 금속성 템페라를 택해 사용한 계기이자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배경으로 자리합니다.

다만 본래의 용도(주조, 산업, 연마 등)가 아닌 것들을 작업에 안료로 사용하기에 뒤따르는 애로 사항들이 있습니다. 입자의 크기 및 무게에 따라 접착제를 어떤 브랜드, 농도의 것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또 마감처리를 위해서는 어떤 것이 적합한지 등등...이제는 어느 정도 데이터가 축적된 상태이지만, 선례 없이 제로 베이스에서 직접 하나하나 실험해가며 데이터를 만들어야 했기에 꽤나 애를 많이 먹었던 것 같습니다. 일례로는 인위적으로 산화시킨 화면에, 산화시키지 않은 화면에서는 별 문제 없었던 바니쉬가 추가적으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변수가 참 많은 재료이지만, 달리 표현하자면 그만큼 가능성이 많은 재료라 생각합니다.


3. 작업에서 사용하는 이미지 선택은 어떤 기준으로 하시는지 한 화면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궁금합니다.

먼저 제게 있어, 제 작업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텍스트’라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여유 시간이 주어졌을 때에, 사람을 만나고 밖에서 활동하기보다 책을 보는 것을 선호합니다. 제 작업이 ‘본다'는 것, 어쩌면 실로 거대한 지점에 대한 것이기에 이런 류의 답변을 드리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싶기도 합니다. 다만 저는 분명, 세상을 책을 통해서도 보고, (전자기기를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지만)SNS를 통해서도 보고, 웹을 통해서도 봅니다. 과정에서 흥미롭게 본 것들을 옮겨 적고, 낙서로 옮기고, 캡쳐해 보관합니다. 그렇게 보고 보관한 것들의 출처, 경로 등에 있어, 어떤 위계와 같은 것을 두지는 않습니다. 어떤 매체를 경유한, 어떤 형태의 것이든 결국 저라는 사람에 이르고 거쳐서 다른 무엇으로 연결되고 이어지는 것들입니다. 저는 이 보관함을 일종의 ‘모티프 풀'이라 부릅니다.

올해 들어서는 책을 보는 것만큼이나 특히 글쓰기를 생활화 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글을 읽고, 쓰며 어떤 키워드를 떠올리곤 하는데, 제가 쓰는 글은 잘 정리된 작업노트보다는 주로 파편에 가깝습니다. 그것이 작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단상같은 것일 때도, 일기에 가까울 때도, 반성문과 같은 글일 때도 있습니다. 글재주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때로는 시처럼, 에세이처럼 두서 없더라도 써내려 가다보면 결과적으로는 그것들이 작업에 대한 것으로 귀결되곤 합니다. 과정에서 특정 키워드에 대해 생각하며, 작업의 내용 이전에 근본적으로 어떤 감각/인상/무드를 주고자 하는지, 그를 위한 작업의 물리적인 형상은 어떠해야 할지, 화면 속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은 무엇일지, 또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구성, 조합되어야 할 지를 생각하고, 글로써 기록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앞서 언급한 모티프 풀 속에서 적합한 것을 꺼내어 각각의 것들에 대해 반추하고 (이를테면 스쳐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 왜-무엇이 흥미를 끌어 보관하게끔 이끌었는가 등), 다시금 쓰고 그리며 작업을 하곤 합니다.

이미지 선택의 기준에 대해 돌아와 정리해 보자면, 먼저 작업의 큰 키워드(이미지/무드/감각/인상)를 잡고, 그에 따른 형상을 제작하고, 이후 형상이자 화면이 될 재료로서 모티프 풀 속(실제로 본 것, SNS, 웹을 망라해 수집한) 장면/글/드로잉 따위를 꺼내어 다시 반추하고, 키워드를 잘 드러낼 수 있게끔 선택하고, 그려내어 최종적으로는 ‘이미지’를 만드는 ‘만들기’의 작업입니다. 결국 넓은 의미에서, 제 작업과 종이라는 것에 있어 지면紙面은 곧 지면地面입니다. 글과 모티프 풀을 오가며 걸러진 것들이 실제 화면에 오르는 도상(이미지)의 기준이 되고, 하나의 키워드나 문장에서 파생된 서로 다른 도상들이 한 화면 안에서 병치되거나, 중첩되며 연결되는 셈입니다. 이미지 선택의 기준에 대해 질문주신 것에 대해 적절한 맥락의 답변일지, 또 피상적이지는 않을지 염려됩니다. 다만 현 작업에 있어 텍스트는 작업의 구상 단계에서 뿐만 아닌, 작업을 진행하고, 또 제목을 짓고 갈무리하는 전 과정을 아울러 중요한 요소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4.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점도 함께 듣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본인의 작업에 책임을 다 하는것을 중요히 생각합니다. 그 책임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 타자를 자처하지 않는 것, 꾸며내지 않는 ‘솔직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창작자로서 작업 전반에 본인의 입장을 확실히 하는 것, 당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서도 문제 생기지 않게끔 안정성을 확보하는 일 역시 책임에 해당할 것입니다.

어떤 맥락에서든 창작자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함을,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여실히 느끼곤 하지만, 그리하여 저 스스로 작업 앞에 오롯이 떳떳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독백. 방백. 독백>

20세기의 마지막 해 여름 A가 태어났다.
아니, 그의 주민등록번호를 미루어보아 그 즈음부터 있어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A는 두 쌍의 부모가 있다.
두 쌍의 부모 중 한 아버지는 A의 고3 여름에 죽었다.
A는 사춘기 무렵, 혹은 유년시절부터 존재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A는 그의 이름이 불쾌했다.
A는 방황을 많이 했다.
A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며 일탈을 일삼곤 했다.
A는 그러나 함께일 때도 혼자일 때도 항상 외로웠다. 
A는 성인이 되자마자 서울로 망명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태어났을 B가 있다.
B는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한다.
B는 문신을 업으로 삼게 되며, 스스로 본인의 이름을 다시 지었다.
B는 슬픔을 좋아하는 것 같다.
또한 B는 항상 외로운 것 같다.
B는 연인에게 이별의 말을 내뱉고, 슬픔에 빠지기를 좋아한다.
일정기간 멜랑콜리의 시간을 만끽한 후 B는 다시 재회의 고백을 한다. 이를 반복하기를 몇차레, 지쳐버린 그의 연인은 처음으로 먼저 B에게 이별을 고한다.
B는 담담히 받아들인 후, 목구멍으로 약을 털어넣어 자살한다.


2020년 C는 가르침 받던, 가장 존경한 문신사에게 “너는 내가 데리고 있을 가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C는 스스로를 놓아버렸다.
이제 C는 본인의 존재가치를 이성 관계로부터 찾는다.
C는 스스로 타자를 자처한다.
C는 상대방이 듣고 싶어할 말, 원하는 모습을 연기한다.
C는 연인과 함께 살며, 동시에 다른 이성과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 함께 살기도 한다.
C는 그에게 호감을 표하는 이성들과 짧은 만남을 반복한다.
C는 그러나, 도무지 충족되지 않는 권태에 어느날 번개탄으로 자살한다.
C는 연인에게 “단 한번도 너를 진심으로 좋아한 적 없다.”는, 본인도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르는 말을 내뱉었다.
2021년 여름, 검정치마의 <피와 갈증>을 들으며 C는 죽었다.


D는 헤어진 연인과 이별 후에 30개월을 함께 살았다.
D에게 옛 연인은 이별 후에 가족이 되었다.
D는 어째서인지 향 내지는 냄새에 예민하다.
D는 스스로를 놓아버린지 오래다.
D는 또한 이성들과의 짧은 만남을 반복한다.
D는 본인의 일에 나름 몰두했으나 역시 늘 외롭고 권태로웠다.
그래서 D는 2022년 여름, 맨정신에 한달치 약을 털어넣고 자살했다.
D의 자살은 특별히 우울하다거나 슬퍼서라기보다는 수지타산이 맞지않다 판단한 합리적 선택이었다.


E는 혼자 남겨졌다.
E는 홀로 남겨지기를 자처한다.
E는 자살이 합리적이지 않음을 안다.
E는 아무리 죽으려해도 어떻게든 다시 살려 놓고, 행동에 대한 대가로 값비싼 응급실 진료비, 입원 치료비를 부담해야함을 알아버린듯 하다.
E는 문신을 하며 자연스레 함께하게 된 16살 터울의 깡패 형님과 함께했다.
그 형님은 문신사이지만 동시에 깡패이기도 하다.
그에게 반달이라는 명칭이 적합할지는 모르겠다.
E는 그에게 여러모로 많은 것을 배웠다.

E는 동거생활 말미에 임대인과, 또 동거인이었던 옛 연인과 집, 부동산 계약, 돈 관련 문제로 한참이나 골머리를 앓았다.
E는 우여곡절 끝에 타투샵에서 살게 되었다.
E는 16살 터울 깡패 형님에게 꼬마잡혔다.
E는 타국으로 게스트워크를 떠난 반달 형님을 대신해 타투샵을 관리했다.
E의 집은, 오전 2시~오전 10시까지만 집이며 그 외의 시간은 타투샵이다. 그러나 다수가 이용하는 타투샵은 E에게 집이 되어주지 못했다.
E는 월세를 감당해야 했기에, 다른 작업자들이 샵을 나가지 않게끔, 잘 유지되게끔, 부단히, 잘 관리해야 했다.
E는 하루도 맘편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위층에는 파티룸, 사방의 클럽으로부터 넘어오는 소음과 진동.
클럽거리 한가운데에 위치한 E의 집 아닌 집은 E에게 수면제와 술 없이는 잘 수 없는 불면증을 안겨주었다.
E는 그곳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서럽게 울었을 것이다.
그의 여덟번째 내일은 분명 ‘잘 놀다 갑니다’가 될 참이었다.
E는 그무렵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듯 어떤 제안을 받는다.
E는 그 제안의 미팅날 밤, 솔직한 얘기들을 쏟아내고서 반달 형님에게 죽을뻔한다.
같은 날에 희망과 절망을 오간다.
둘 모두 잔인한 것임을 E는 여실히 느낀다.


E는 아파서는 안되었다.
그건 아마 아파도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주변인들은 그가 철인인줄 알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감기몸살에 도무지 견디기 힘들었을 하루, E는 편히 쉴 곳을 찾아 모텔에 간다.
그런 날들에는 모텔에 가서 휴식을 청했다.
그곳에서 비참함에, 참 서럽게 울었다.
버티고 버텨 E는 그의 몫을 지켜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본래 동네에, 사람에 이골이 났기에, 고립을 자처하며 그는 이제 연신내로 망명하기로 한다. E는 연신내로 이사한지 하루만에 임대인 할머니와의 문제로 계약해지를 당하게 된다.
그렇게 E는 이제 응암의 무인도로 망명한다.
E의 무인도는 주거공간이며 작업공간이고, 주거공간이 될 수 없으며 작업공간조차 될 수 없다.
E는 쫓겨나듯 도착한 무인도에서 특히나 불안했다.
E는 두달간의 무인도 생활을 청산한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애석하게도 그에게 집은 여전히 집이 되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E는 학교에서 보다 집과 같음을 느낀다.
그래서 E는 항상 집보다 학교에 있는다.


E는 항상 혼자 있다. 그러나 혼자인 동시에 항상 누군가와 함께한다.
E는 A, B, C, D...등의 이들과 항상 함께이면서 함께하지 않는다.
E는 하루 24시간 중에서도 오락가락 기복이 심하다.
E였다가도, 당연히 그런줄 알았다가도 불현듯 C였음을 자각하고, 갑자기 뜬금없는 F가 되어있는 본인을 발견하기도한다.
그에게 하루는, 어제는, 내일은, 오늘은, 그 모든 구분은 그닥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
그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도무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뒤엉킨, 현재에 가까울 것이다.


E는 반성을 참 많이 하는 듯하다.
C는 더이상 미안할 사람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B는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음을 잘 알 것이다.
A는 평생 흘릴 눈물을 이미 다 쏟아내 버렸을 수도 있다.
D는 그가 겪은 대부분의 것들이 스스로 자처한 것임을 알 것이다.
그는 가급적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E에게는 어쩌다보니 참 많은 기스가 나버린 듯 하다.

누구에게도 쉬이 얘기 못할 법한 것들을 공유해준 A, B, C, D, E..., 그들 모두에게 나름의 감사를 표한다.







<어제 / Hier / Yesterday>

향기. 향기에 관해 이어서 써본다.

바이레도_모하비 고스트
크리드_실버 마운틴 워터
프레데릭 말_로 디베
산타마리아 노벨라_알바 디 서울
디에스 앤 더가_아이 돈 노우 왓
바이레도_발다프리크
본 투 스탠드아웃_DGAF
크리드_오리지널 베티버
빌라 에르바티움_콘솔라티오
조르지오 아르마니_부아 당 상
톰포드_오드 우드
르라보_떼 누아
로에베_아이레 수틸레사
샤넬_코코 누와르
조말론_라임 바질 앤 만다린
논픽션_젠틀 나잇
메종 마르지엘라_웬 더 레인 스탑스
그랑핸드_수지 살몬
바이레도_집시 워터
에따 리브르 도량쥬_헤르만
조말론_우드 세이지 앤 시솔트
탬버린즈_카모
샤넬_블루 드 샤넬
발렌시아가_플로라 보타니카

많다.
참 많이도 사모으고, 선물 받고, 거쳐갔고, 쓰고있는 것들이다.

향수에 있어 내 취향을 말한다면 우선 ‘우디'한 향일 것이다.
다만 ‘Woody’와 ‘Wood’, 우디한 향과 우드의 향은 같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우디'이지 ‘우드’가 아니다.

향수.
산과 바다라는 상징적 구도.
향수에서는 산과 바다, 혹은 숲과 바다가 함께일 수 있다. 공존할 수 있다. 동시에 내게 올 수 있다. 
푸른 산과 바다.
예컨데 이솝_미라세티, 조말론_우드 세이지 엔 시솔트와 같은 향수들처럼.
바다의, 바닷바람 짠 내음과 숲의, 숲 속 공기 내음이 함께 오는 것.
나는 우디한 향을 좋아하는 것이지, 우드의 향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산과 바다라는 상징적 구도.
산은 바다로 바다는 다시 산으로 연결되어 존재한다.
산이 바다로 연결되는 묘한 맞물림.
산에서 시작해 파도의 형상을 만들고, 대각선들이 끊임없이 상승하고 하강하며 양 극단의 지점을 찍어내는 것.
끝없이 흐르는 바다처럼 계속해서 숨쉬는 산처럼.

푸른 산과 바다.
파랑과 초록, 색의 경계를 명명하는 것.
여전히 신호등의 빛은 초록불도 파란불도 아닌 그저 푸른빛이다.
어둠에서 푸른빛으로 푸른빛이 파란색과 초록색 사이를 진동하며 다시 어둠으로 향하는 운동성.
내가 좋아하는 것은 ‘우디'이지 ‘우드’가 아니다.
우디한 것은 푸른 빛으로, 묘하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어제,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내가 죽는 꿈을 꾸었다.
내 무덤을 보았다.
그곳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초만 무성했다.

한 노파가 무덤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나는 왜 내 무덤을 아무도 돌보지 않느냐고 노파에게 물었다.
-  이건 아주 오래된 무덤이구먼. 그래. 날짜를 봐요. 이제는 아무도 그가 여기에 묻혀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가보우.
나는 날짜를 보았다.
올해였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잠이 깼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침대에서 하늘과 별들이 보였다.
공기는 투명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걸었다.
비를 맞으며, 진창길을 무작정 걸었다.
내 머리칼도, 옷도, 다 젖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내 발이 너무 하얗기 때문에 진창 속에서 두드러져 보였다.
구름은 잿빛이었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날씨가 추웠다.
비는 차가웠다.
진창도 차가웠다.

나는 걸었다.
간혹 다른 행인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가벼워 보였고, 무게가 없는 사람들 같았다.
뿌리가 없는 그들의 발은 결코 상처받지 않았다.
그것은 집을 떠난 사람들,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가는 길이었다.
그 길은 아무 데로도 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것은 끝이 없는, 넓고 곧은 길이었다.
그 길은 산맥을 넘고 도시를 가로지르고, 정원과 탑을 지나갔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길은 사라져버렸다.
앞에 곧게 뻗은 길이 있을 뿐, 여기저기에 큼직한 물웅덩이들이 생겨났다.

시간이 갈라진다.
유년의 빈 공백은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어두운 공간에 갇힌 일그러진 태양은?
허공에서 전복된 길은 어디서 되찾을 것인가?
계절들은 의미를 잃었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뿐.
어떤 때는 눈이 온다.
또다른 때는 비가 온다.
그리고 나서 해가 나고, 바람이 분다.
이 모든 것은 현재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었고, 미래가 아닐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왜냐하면 사물들은 내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다.

어제, 나는 호숫가로 갔다.
지금 물은 너무 시커멓고, 너무 암담하다.
저녁마다, 잊혀진 나날이 물결에 실린다.
그것들은 마치 바다 항해를 떠나는 것처럼 지평선을 향해 멀어져갔다.
그러나 바다는 여기서 너무 멀다.
모든 것이 너무 멀다.

나는 곧 치료될 것이다.
무언가가 나의 내부나 공간 어딘가에서 부서질 것이다.
나는 미지의 깊은 곳을 향해 떠날 것이다.
대지 위에는 수확과 참을 수 없는 기다림과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이 있을 뿐이다.

-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중





NAKANOJO BIENNALE.Nakanojo Biennale.나카노조 비엔날레.
재밌는걸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군마현 나카노조.
산과 바다.
나카노조의 산과 바다.
시마 온천.학교.주택.목조 주택.다다미.숲.삼림.





<애너그램 Anagram>


오지 않을 내일과 또 다른 내일.
오지 않을 내일. 또 다를 내일.
오지 않은 내일. 또 다를 내일. 
오지 않은 내일. 또 다른 내일.
오지 않을 내일. 또 다른 내일.
오지 않을 내일에 대한 소고를 마친 후.
이 내일에는 무엇이, 어떻게 있어 마땅할까.

일력, 일력의 그리드, 그리고 그것의 연장.
벤치, 나무 벤치의 표면과 틈새.
나무 밑둥.
나무.
나무 잎사귀에서부터, 겨우내 앙상히 움츠려든 나뭇가지
적막한 밤의 덩그러니 남겨진 나무 한그루
울창한 숲 속 혹은 강 건너의 가로수들까지.

이 모든 있어 마땅할 것들이 두서없이 뒤엉키거나.
능청스레 이것이 되었다 저것이 되었다 하거나.
다시 또 능청스레, 이전의 그것과 이어지는 듯 어긋나거나.

셀 수없이 부딫히고, 마모되고, 깎이고, 바뀌고, 소모되어서
본래 그것이 지녔을 법한 색이, 빛이 바래어 버린 듯
그것의 생애에 비해 한없이 오래된 것을 흉내내거나.

어차피 그 속이 비워질 것이지만.
오지 않은 내일의, 혹은 오지 않을 내일의 허물일 수도
또 다른 내일의, 또 다를 내일의 기꺼운 허물일 수도
혹은 그저 그런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을 테지만.

(불)분명한 시작도 종결도, 그 이유도 무의미할.
열일곱 번째의 이 내일은 마땅히 그러할 테다.




<결핍을 결핍할 수 있게>


“태초에 사람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또는 남자와 여자의 몸 두 개가 하나로 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힘과 오만함이 신의 노여움을 사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벌을 받았고, 이후 본래 한 몸이었던 상대를 평생토록 찾아 헤매이게 되었다.
이것이 사랑의 기원이다.”
- 플라톤 <향연> 중

헤드윅.Origin of Love.본래 하나 였다 둘이 된 것.
마주보거나 등을 맞대거나, 혹은 등을 돌리거나.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완벽한 사이가 되거나, 처참하게 부서지거나.

바닥 없는 집과 천장 없는 집이 만난다.
둘은 중력의 끌어당김에 함께 저항한다.
하나는 위에, 하나는 아래에 위치해.

바닥과 천장의 구멍을 공유하며.
위태로워 보이지만 꽤나 안정적으로 서로를 지탱할 수도.
혹은 처참히 무너져 내릴 수도.

시간.
위계.
종적 흐름.
종적인 듯한 흐름.
종적일 수도, 아닐수도 있는 흐름.
종적이나, 그것이 흐름의 양상은 아닐 수도 있는.
시간.

내일 no.17은 내일 no.16의 뼈대.속.지지체를 절단해 뒤집은 형태.
뒤집히며 좌우반전이 된 것.
그것을 다시금 깎고 덧붙여, 맞닿는 면을 알맞게, 딱 들어맞게 만드는 것.
마치, 내일 no.16이 있어야만 할 곳을 찾아주는 일처럼.
뒤집히며 서로 등을 맞댄 형태.
허나 결코 같아질 수는 없는.
수면에 비친 상像이며, 동시에 등을 맞댄 상相.
같은 기원을 공유하지만.
침잠하는 것들로 투사되었거나, 아예 달라져버렸거나.
그래서 본래대로 돌아갈 수 없어졌거나. 혹은 그러할 필요가 없어졌거나.
그런, 아이러니한 형상.
아이러니한 결합.
아이러니한 구조.


내일 no.16의 결핍. 내일 no.17의 결핍
바닥 없는 집. 천장 없는 집.
구멍.
구멍과 구멍.
결핍과 결핍의 결합.
결핍의 결핍.
더이상의 모자람도, 과함도 없는.
그저 그 뿐인.
그저 그 뿐일 수 있게 된.
비로소야, 그 뿐일 수가 있게 된 것.

그렇게, 결핍을 결핍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

- 이승은 <굴절> 중




전혀.전혀전혀.예상치 못한.난관.혹은 돌발표시(라 칭할 수도 있을)가 될 수도 있을 법한.오히려 좋을 수도(마땅히 그리 만들어내야 하겠다만은...)
좌우반전.
연결되는 듯 안되는 듯.
이어지는 듯 아닌 듯.
불연속 연속 불 불연속 불 연속 연속
아이러니.멜랑콜리.위태로움.
구멍.보여짐.결핍.
결핍 너머 보게 되는 것.
결핍이 있기에 볼 수 있는 것.
결핍으로 말미암아.비워냄으로 말미암아 채워지는 것.느낄 수 있는 것.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

수면의 비침.미장아빔이며 미장아빔이 아닌 것.왜곡.아이러니.불연속연속.기만.
수면.비침.굴절.분열.
잔잔한 수면.그 비침.지탱하는 것.맞물리면서도 맞물리지 않는 것.
잔잔한 수면.동시에.출렁임의.불연속연속.아이러니
구멍.구멍의 이어짐.혹은 닫힘.
결핍.결핍의 이어짐이자 충족.동시에 은폐이거나 숨김의.
선택과 집중.무엇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
시각적 쾌(위태로움.아이러니).물리적인 지탱.구조의 (안정적)구현.둘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합리적 선택에 대해. 





<내일의 향기>

향기. 향에 관해 쓰고 싶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
이들 간의 조율을 잘 하는 것이, 직업(professional)으로써 작가의 역량.이란 가르침을 언젠가 받은 바 있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
여러 맥락, 의미로 생각해 봄직한 것들이다.
다만, 그 조율에 미숙하기에 스스로 타자를 자처하기도. 그래서 다시금 복기하고 반성하고.
결국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나머지 둘을 아우를 수 있음을(공허하지 않은 작업으로) 소회한다(적어도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근데 이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생각이 나지 않더이다.
관심사.취향.음악.문학.패션.사람.이상형...
사소한 것 하나하나,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 한참을 생각했던 것 같다.
향수. 나는 향수를 좋아한다.

나는 향을 좋아한다.
향에 민감하다.
향은 중요하다.
향은 베인다.
향은 휘발된다.
향은 각인시킨다.
향은 인상을 남긴다.
향은 휘발되고, 다시금 소환하고.호출하고.불러일으킨다.
향은 남긴다.
향은 무엇이건 남긴다.
향은 비가시적이지만 무엇을 남긴다.
향은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지만 무엇인가 남기고 다시금 호출하여, 곧, 보게끔 한다.
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어딘가에 스며들기도 베이기도 하며, 이내 휘발되기 마련이지만, 남겨졌을 이전의 것을 지금에 이르러 다시금 소환해 또 다른 형태의 이전이자, 동시에 지금의 것으로 보게끔 만든다.
향은 그렇게, 아이러니하고 매력적이고도 또 치명적인 것이다.

인품즉화품人品卽畵品
예로부터 사람의 품격, 됨됨이가 곧 그 사람의 그림의 격이랬다.
알베르티의 회화론.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될 법 하다는,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




오지 않을 내일에 대한 소고





<마중물, 위티시즘>

내일 no.16.냅다 절개.속을 채우던 것을 빼 내고.수술 집도 후(260628).보수 중에 있다(260629).
마치, 애초에 나기를 이렇게 난 것처럼. 그렇게 보일 수 있게끔. 충분히 아이러니할 수 있게. 어찌 보면 기만의 행위, 혹은 그런 심리의 반영일 수도.

개별 작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전시를 어떻게 구성할지.구성할 수 있을지.이제서야(드디어) 실마리가 잡히는 듯 하다.
한참이나, 답답하게, 마치 근 몇달간의 내 머릿 속을 채우던 것을 비워냈다.
비워진.사방으로 구멍 뚫린 내일은. 그것을 보고자 하면.구멍 너머의 것이 보일 수 밖에 없다.

한없이 침잠하는 것. 가라앉는 것.
그와 함께 떠오르는. 비상하는 것.
격정. 환희
시간.
멜랑콜리와 아이러니.
수면.
그림자.
결핍의 결핍.
내일.
보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
위태로움.
아름다움.
분위기-무드-인상-감각-이미지

각기다른 맥락의.파편의 형태로, 두서없이 부유하던 것들을, 하나로 수렴될 수 있게끔.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령, 아직은 그저 한줄기 실낱과 같은 것에 가까울 테지만.
그렇게, “느낌이 왔다"는, 꽤나 무책임한. 글.말을, 오늘은. 감히 뱉어내어 본다.
그렇게.
느낌이 오고서야 말았다.
유레카!
내일은 또 어떨지, 그것은 예측할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오늘. 오늘 만큼은 유레카.
이제는, 내부.내면 너머의 사고.그러한 영역에, 보다 집중하고. 사고하고, 몰두해. 본격적으로 달릴 테다.




<단절선과 파열선>


내일은 위태로워야 한다.
내일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야 한다.
내일은 멜랑콜리하고 아이러니해야 한다.
내일은 빛과 소금이어야 한다.
내일은 눈이 부시도록 아린 빛이어야 한다
내일은 빛이여서, 환히 비추어 보여줄 수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내일은 중하게 필요로 하지만, 무턱대고 삼켜버려서는, 끝끝내 다다라서는 안될 소금이어야 한다.
내일은 소금이여서, 바닷물의, 저의 녹는점 아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없으면 안되는 것이여야 한다.
내일은 홀로됨에 고독을 느끼시는지, 자유로움을 느끼는시지 모를 왜가리일 수도 있어야 한다.
내일은 달력의 반복되는 수직 수평의 그리드일 수도, 한 겹 막을 너머 보게 하는 창문 같은 것일 수도 있어야 한다.
내일은 빗물의 하강과 상승 운동일 수도, 그 가운데 자욱안 안개일 수도,
파도치는 바다일 수도, 범람하는 강/계곡일 수도 있어야 한다.
내일은 청량한 낮의 하늘과 구름일수도, 적막한 밤 혹은 새벽의 안개일 수도 있어야 한다.
내일은 세차게 내리는 비일 수도, 수면에 비친 어렴풋한 빛일 수도 있어야 한다.
내일은 집이 되어줄 줄도 알아야 한다(근데 이제 바닥이 없는, 혹은 온전치 못한, 하여 결코 ‘집’이 될 수는 없는).
내일은 (불)분명 해야 한다.  
내일은 텍스트로부터 출발하기도, 텍스트를 재료 삼기도, 텍스트로 말미암아 방향을 틀고, 텍스트로 갈무리하지만, 결코 텍스트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내일은 쉽게 쓰여져서도, 간단히, 편리하게 설명되어져서도 아니 되는, 그런 묘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의 내일은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기를 바란다. 치명적이리만큼. 사무치게.






<이미지의 생生>

.






(가령)무엇을 바라보고.기억하고.붙잡아 두려 했는가.
종이.를 어떻게 바라보고.이해했는가.
여전히 종이 앞에 서는가.



과시적인(어떤 방면으로든) 글쓰기.는 지양하도록 하자. 

내일 no.16_오지 않을 내일을 위해 인디언식 기우제를.멜랑콜리와 아이러니.복잡하게 생각 말 것.




<들숨과 날숨. 그리고, 인용>

간혹 누군가 내게 “작업을 왜 하냐”는 류의 물음을 던질 때에면, 나는 ‘생명 연장'이라는 꽤나 응답을 하곤 한다.
토톨로지.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의 묘미. 들숨과 날숨. ‘생명 연장'이라는 응답은, 작업하는 것이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동시에 그 사뭇 무거운 뉘앙스처럼,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어떤 ‘우울'(우울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한 응답일 수도 있겠다.
좌우지간, 전자의 경우라면, 누군가에게 ‘호흡'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당신은 왜 숨을 쉬십니까?”, “당신에게 호흡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며-어떤 방식.규칙.리듬.으로-왜. 들숨과 날숨의 행위를 반복하십니까?”
이런 물음을 실생활에서 주변에 한번쯤 던져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 될 것 같다.
다만 누군가는 그 ‘호흡’을 위해 작업실로 향하는 매일 아침, 아이러니하게도 호흡곤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호흡하는 법, 들숨과 날숨의 자연스러운 반복을 애써 다시금 떠올리며.
호흡 하러가는 길.

근 몇달간, 그리고 지금도 작업의 솔직함.진심.진솔함.등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IMAGE HANDLING PRACTICE>연작은 작년(2025년) 8월 무렵부터 해오고 있는 작업이다.
타이틀이 뜻하는 바, 정직하게, 말 그대로 이미지를 다루는 능력을 단련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들.
다만 솔직함.진심.진솔함...등에 대해 골몰하며, 이것들 중 대다수의 것들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그저 붓을 휘두르기 위해 행했던 것은 아니었나.
IMAGE HANDLING PRACTICE 01...IMAGE HANDLING PRACTICE 17...IMAGE HANDLING PRACTICE31...
늘어나는 숫자들을 보면서, 뭐라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애쓰고 있다는, 위안을 얻으며 자위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숫자놀이.
올해 2월 말즈음부터 해오고 있는 드로잉들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물성 연구, ‘잘' 그리기 위한 훈련, 본작업 전의 준비 운동...
여러 목적들이 있어왔겠지만, 한편으로는 관성적으로.붓을 휘두르며.그리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고.도피에 가까운 것들 역시 많았을 법하다.
IMAGE HANDLING PRACTICE와 드로잉. 둘다 분명한 목적.지향점.등이 부재한 것들에 있어서는, 먼저 내가 도무지 떳떳할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은 ‘진심'으로 임했다고 할 수 없겠다.

제목. 제목은 참 중요하다. <내일>이든 <IMAGE HANDLING PRACTICE>든 <Drawing>이든 제목은 중요하다.
제목에서부터, 이제는 언급하는 것이 피로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그 진심이라는 것이 드러남을 소회한다.
가령 <IMAGE HANDLING PRACTICE>라면 이미지를 다루는 것 가운데, 특정 무엇을 위한.무엇에 집중한 것인지.
하여 그간 작업실에 틀어박혀 뱉어냈던 대다수의 것들이, 진정 ‘작품'이라 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작품이라 칭하고 싶지 않다. 고상한-괴이한 취미생활의 결과물과 크게 다를바 없을 것.
그래서 전시할 작업이 없다(충분치 않다).
속고 또 속고,  또 또 속고,  또 또 또 속는다. 스스로에게 또 속는다.

오늘은 작업실에 나와, 안경수 작가님의 <시화호>를 임臨하며 시작했다. 정확히는 <안경수, SIHWA LAKE 시화호, 2021.의 웹 이미지>를 임臨했다.
동일한 이미지를 임臨한지 오늘로 3회차.
 캔버스 - 파스텔지
 아크릴릭 - Metallic tempera
 53 x 45.5 cm - 38 x 27 cm
다루는 화면의 크기, 바탕-안료의 차이 및 입자감. 그에 따른 붓질과 호흡...등등.
나름의 목적성이 휘발되지 않게끔, 붙들고서 임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화호(의 웹 이미지)는 아직 눈으로 좇기에 급급하다. 좇는것 조차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문민, 260625_[臨]_SIHWA LAKE 시화호(의 웹 이미지)_3>.

대학원에서 함께 수학중인 동료A는 ‘인용하는 그림'을 그린다. 그의 작업에 방법론은 ‘인용'이랬다.
글쓰기의 인용처럼, 작업으로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것’들을 인용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랬다.
그 ‘것'(A의 작업에서는, 실제로 텍스트에 해당하는 것들이 많은 듯 하다)들을 내 식으로 얘기한다면 ‘재료'들일 테다.
과거 주방일.음식을 했던 경험.그때 느꼈던 것.작업과 요리의 유사함.을 바탕으로 나는 종종 작업을 요리에 비유하곤 한다.
무엇을 재료삼아 삼키고 소화해 작업으로 만들어내었는가.
인용과 요리. 것-재료 .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가. 혹은 드러냄에 있어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 다만 근본적으로 나의 요리와 그의 인용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싶다.
내게 있어서도 ‘텍스트'는 매우.매우.매우 중요하다.
역시, 작업의 언어를 공고히 해야 할 테다.




-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도런스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  존 윌리엄스 <스토너>
-  릴케 <두이노의 비가>
-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 ✔
-  김민정 <각설하고>
-  이상운 <신촌의 개들>
-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  마루야마 겐지 <달에 울다> ✔
-  크리스토프 바타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




<나는 왜 위태로운 것들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하나 비(花火) 라는 말. 일본어로 불꽃놀이를 ‘하나 비’ 라고 하는 데에는 지는 꽃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던가. 마치 배반하는 언어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단어같기도 하다.
밤하늘에 쏘아 올려졌다 사라지는 폭죽의 잔상. 폭죽이 갖가지 색으로 터지면, 밤하늘은 일순간 낮처럼 밝게 빛나고. 끝끝내 그 잔상들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나면, 떠나버리고야 말면, 마땅히, 다시 또 밤하늘이 찾아오는 것이다.
[멜랑콜리]와 [아이러니]. 그러한 이치 속에, 세상이 온갖 빛깔들로 행복해질 때면, 그것이 색을 앗아가 더욱 발하는 것 마냥 나의 세상은 점차 색을 잃고 더욱 흑백이 되어왔던 것일테다.

시간이라는 단어로 일축하는 것. 세상의 이치라 할 법한 그것은, 우울하고 애매하게 만들기-멜랑콜리와 아이러니 따위의. 그러한 류의 것들을 느끼게끔, 생각하게끔 한다.
우울하고 애매하게 만들기. 시간이 하는, 할 법한, 할 수 있는, 할 수 있을, 하곤 하는 일. ‘우울'이라는 표현은 가급적 사용하고 싶지 않기에, 멜랑콜리로 대체하려 한다.
위태롭기에,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는 것들. 그러한 것들은 대체로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강인하지만 여리고. 기쁜 동시에 어딘가 슬픈-아련한 구석이 있고. 견고하면서도 유약하고. 그렇기 때문에 날이 서있고.
명확히.명료히.설명할 수 없는.어느 한 일면만 가지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감히 그리 해서는 안될 것 같기도한.
그렇기에 묘한.
그 ‘묘함’이, 위태로움을 아름답게끔 느껴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위태로움. 묘함. 멜랑콜리.
‘멜랑콜리'도 나르시시즘의 일종이랬던가. 아이러니하다.

임臨.모模.방倣. 이들이 같지 않음은 자명하다. 모模는 본뜨기. 임臨은 보고 따라 그리기. 방倣은 앞선 과정들을 거쳐 선대의(대가의) 것을 체화한 뒤의 재해석.
후쿠타 토요시로 福田豊四郎Fukuda Toyoshiro의 <파도>는 퍽 흥미로운 그림이다. 그래서 먼저 하루는 임臨을 했다. 작업실에 나와 매일 행하는 루틴의 일환으로.
그가 보았던 파도는 어떤 것이었을 지.어떻게 보았길래.보였길래 그리 그려냈을지를 생각했다. 1938년에 그려진 그림. 지금.2026년의 여기.에 있는 나.와 한 세기에 가까운 시차를 두고.
다음 하루는 방倣을 했다. 아마 언젠가 SNS에서 캡쳐했을, 사진첩 속의 바다 풍경 하나를 골라, 내 나름 방倣해 그렸다. 금속 분말의 조합.바인더.마감재.의 기록 뿐 아니라 해당 드로잉의 재료이자 목적을 기록했다.
“후쿠타 토요시로Fukuda Toyoshiro의 보는 법, 붓질, 과거로부터의 체화, 변용".
말끔히 지울 수 없는 볼펜으로 이를 다 표기한 뒤, 성공적으로 방倣했는가,를 생각하며 한참동안 드로잉을 바라보던 중 문득 찾아온 괴리감.
그것은 ‘과거로부터의’라는 부분으로부터 말미암았을 터이다. 임臨이던 모模던 방倣이던, 눈 앞의 ‘원본'을 전제로 한다. 다만 내가 임臨하고 방倣했던 것은 원본이라 할 수 없을, <파도>의 스크린 이미지.
아무래도 “과거(를 위시한 동시적.혼종적 시간.카오스)로부터의 체화, 변용"이라는 표기가 적절하리라. 미디어 환경, 유사와 상사 따위의 진지한(재미 없는)얘기를 꺼내야 할 것만도 같다.
역시 아이러니하다.

지난 가을 무렵 목도했던 공연장의 음악.폭죽.전율.괴리.희열.잔상. 미처 망각해버리지고 싶지는 않기에, 되새김질로, 삼키고 내뱉었던 대부분의 것들을 다시금 홀로 곱씹으며 음미한다.
늘 다다르면 사라지고 없었던, 폭죽의 잔상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부서지지 않은 것들. 그러한 것들을 향해 숨이 차도록 뛰어가느라 걸으면서도 헐떡이던 내가 흑백사진처럼 있었던 탓은 그와 같았음을.
그러나 그런 내 사진첩 속에선 단 한 장도 흑백 사진을 찾아볼 수가 없고. 그렇게라도 색에 물들고 그저 더 밝게 타올라 보고 싶었던 것을 가만 헤아려보면서.
밝게 타오르기만 하며 빛만 내리쬔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바다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눈이 시리도록 차오르는 물빛에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면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라고 쓴 적이 있었나. 내가 썼던 것은 맞나.
시지각, 원근, 환영, 일루전 따위의. 그럴싸한.얄팍한 외피로 어느샌가부터 덮어 두고 있었나.
아프도록 가득 차는 물빛에 두 눈이 멀어도. 바다를 바다로 바라보겠다고. 사랑을 사랑으로 바라보겠다는 말을 건네어보면서.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이제는 솔직해져 보겠다는 다짐으로.
두서 없이 휘갈기는 믿음 속에, 나는 약간의 흑백사진처럼, 여전히 남아있고자 함을.





반려동물-반려식물-반려그림




<오지 않을 내일, 인디언식 기우제>

지면紙面과 지면地面. 두 단어는 한글 표기 상, 같은 자소-음소를 공유한다. 다만 그 속 뜻으로는 “무엇의 겉면-껍데기일 것인가”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종이와 땅. 내 작업이 세워지는 곳이자 물적 재료로서 작업의 중요 일부를 차지하는 것.
공교롭게도, 이 유사적 언어에게 지면은 지면紙面이자 지면地⾯이다.
지면紙面이 지면地⾯이어서, 나는 거기에 집-작업을 짓는다.

짓기.건축을 위한 준칙에는 세가지가 있다.
  • 인식을 생산해낼 것.(이때 인식은 어떠한 형태-경로를 아울러, 의미-감각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때 인식은 어떠한 형태-경로를 아룰러, 의미-감각을 생산하는 것이다. 혹은 ‘긴장감’과 같은 양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멈춰 서게끔 하는 ‘무엇’이다.)
  • 있을 만하고,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 지어져야 할 것.
  • 적확한 문장/표현/구조/구성으로 지어저야 할 것.(이는 ‘찾는 것’, 내지는 ‘찾아가는 것’. 당장에는 다소간의 서투름이 드러날지라도 유의미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 곧 과정에 해당될 것이다)

특정한 인식을 가감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작업이 있다는 플로베르적 가정. 그러한 문장-발화-작업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으리라.
이를 위한 최우선의, 앞선 세가지에 선행하는 준칙이 있다.
나름의 공학적 기틀-본인만의 분명한 입장-당위에 근거해, 조합-제작되어야 할 것.

이들을 모두 충족하는 작업의 시각적 균형-보여짐은, 보여짐에 내재하는 것. 내용.의미.사유의 구조적 균형을 반영한다-반영해야만 한다.
이제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다. 한 단락-요소-재료도 더하거나 빼면 이 건축물-작업은 무너진다-무너져야 한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 세상에는 교환 아닌 것이 없으므로, 좋은 작업을 얻고 싶다면-만들어내고 싶다면, 이쪽에서도 가치있는 것을 줘야한다는 것(마땅히).
생명-시간을 내어주고 <내일>을 만든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작업에게), 곧 시간을 준다는 것.
케어-작업이란 시간을 주는 일이라는 것.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들이지 않았다면-투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

생명을 주고 바꾼 것들. 그러니 이것들을 쓰면서-제작하면서-만들어내면서 나는 죽어왔고, 죽어가고, 죽어갈 것이다(마땅히).
그러나 여지껏 단 한번도 내게 충분치 않았다. 아마 지금도, 앞으로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마땅히).
그렇기에 인디언식 기우제를.
인디언식 기우제는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다. 이는 곧, 안되면 될 때까지 하고자 함이기에.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마땅히).





[폐허.의 형상]. [아무리 헤집어도 늘 빈칸 뿐인 시간을 채우는 것]

“ 철학적 은유로서의 유령은 예술적 상상처럼 실재와 가상,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닫아 놓은 우리의 굳센 의식을 흔들어 놓는다. 이제 유령의 움직임은 대립을 해체하며 대리적 보충 관계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데리다의 예술작품 속의 유령은 에르곤(ergon,작품, 본질)과 파에르곤(parergon, 액자, 틀, 부수적인 것, 장식적인 것)의 대립 관계를 무화無化시킨다. 무화의 세계에서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던 틀이 작품을 참칭僭稱하려 시시때때로 중심의 자리는 넘보기도 한다. 이제 본질이라 여겼던 것이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때로는 틀의 압박을 못 견디고 부서지기도 한다. 이러한 참칭과 압박은 예술적 초월이 지향하는 걸음걸이에 비유될 수 있다. 초월로 향하려는 철학에게 데리다의 유령은 예술적 상상력에 집중하기를 요구하는 은유적 몸짓인 것이다. 우리는 유령의 은유는 실재를 초과하는 예술적 사유의 열린 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술작품 속의 유령이 굳은 의식의 장벽을 허물어버리는 무화無化의 힘을 가졌다면, 장자의사유 속에서 대립 된 철학의 장벽을 허물고, 예술적 초월의 은유를 담고 있는 개념은 ‘도추(道樞, 도의 지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의 ‘도추’는 ‘이것[是]과 저것[彼]’, 옳다[是]와 그르다[非]의 논쟁을 허물어 놓는다. 대립을 허물어버리는 ‘도추’의 세계에서는 “원의 중심에 있으면서, 세계의 무한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得基環中, 以應無窮]” 데리다의 ‘유령’이 대립의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든다면, 장자의 ‘도추’는 빈 중심에서 어떤 대립적 가치와 고정된 의식에 얽매임이 없이, 마치 유령처럼 세계의 변화에 자유롭게 대처할 수 있다는 은유를 담는다. 마치 유령의 ‘유幽’라는 글자가 ‘그윽하다, 숨다’라는 뜻 외에도 ‘아득하다, 멀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처럼, 사람의 의식 범위를 초과하는 모호한 이미지를 속성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유령과 ‘도추’의 은유는 매우 닮아있다.

어찌 보면 ‘유령’과 ‘도추’의 은유는 현대 예술이 지향하는 예술적 상상력을 추동하는 은유가 담겨 있다. 그래서 현대의 예술작품들에서는 실재를 초과하는 무한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예술이 표상하는 형식이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면서, 비실재의 세계로, 초현실의 길로, 비실재의 세계로, 가상의 세계로 확장 되면서, 무한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작금의 현상 속에서 우리는 데리다의 ‘유령’과 장자의 ‘도추’의 은유를 읽어 낼 수 있다. 다만 형식의 다양화에 짝할 수 있는, 의미의 실종 문제가 현대 예술의 남겨진 대답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
- 예술론으로 장자 읽기 30; 데리다의 유령과 도추道樞 -


‘들판 위의 외로운 연기, 사방에 걸린 긴 강’ -> 해질녘 사물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한림도화원]과 텍스트-(리터럴리)언어-캡션.
[자문자답]의 작업 결과물+그것을 매개한 질문 던지기.  제목-캡션-텍스트-(리터럴리)언어의 항. 그것의 기능-역할-당위. 작업의 구조.프로세스-작업과의 관계.
해질녘의 @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해질녘의 @이 있어야 할 곳은.  해질녘의 내일이 있어야 할 곳은. 해질녘의 내일이 자리할 곳은. 해질녘의 내일이 자리한 곳은. -> A -> Aa/B/Ba/Bb/A...+@
[자문자답]의 작업 결과물+그것을 매개한 질문 던지기. ->  이를테면 작가-화자-창작자는 이렇게 본다는데.당신은 어떻게 보는가.와 같은.

-말라르메_램보_보들레르_시인
-스테판 말라르메_주사위 던지기

[달동네]-삶의 궤적-무엇을 그리는가-어떻게 이해하는가-시대상
-달을 보며 출근.달을 보며 퇴근했던 노동자
-고지대.판자촌.물리적으로 달과 가까운 동네


이제 기존의  [도상-표면-공간-감상]의 구조에 [캡션/제목]이라는 리터럴리 언어적-텍스트.의 항을 추가해야 할 것.  (혹은 해당 요소는 경우에 따라 [감상]의 항에 속할 수도 있을 것)
본다는 것.을 주제로 한다 했을 때. 미술사의 방대한 아카이브 가운데. 예컨데 호크니(포토콜라주.멀티캔버스 파노라마.횡적으로 기다란 동양화의 타자성_그 형식의 차용)또 그에 선행하는 큐비즘(다중시점.파피에콜레)등과.어떻게 대별될 수 있을 것인가.
그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동양화]내지는[한국화]의 맥락에서 나의 위치를 재검토할 필요성. 형식만을 빌려올 것인지,전면에 내세울 것인지.역할-포지션에  대한 입장정리.  후자의 경우(전자 역시 필요로 할 터이지만) 동양미학-동아시아 회화사에 대한 학제적 수준의 탐구가 필요할 것. 어떤 경로로 나아갈 것인가.어떤 태도-입장을 취할 것인가에 따라.  그 선택을 유보한다거나. 어줍짢게 [외피]만을 빌려 밑바닥을 드러내는 형태는 지양할 것. 주체적인 선택을 해야 할 것.그에 따른 온전한.충분한 책임을 다해야 할 것.
한림도화원_전문 화가 제도적 기반
입학 시험 특이점_[시제]를 주고 그림으로 표현_문학적 의경을 그림으로 옮길 수 있는가.
‘들판 위의 외로운 연기, 사방에 걸린 긴 강’ -> 해질녘 사물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유명한 시험 예시
>>>언어-보기-캡션.제목-작품. <내일> 제작 프로세스에 도입한다면?
동양 삼원법vs서양 원근법_[보는 방식]의 철학적 차이_두 체계는 [본다]는 행위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
[서양 원근법]
  • 단일 시점
  • 한 곳에 서서 바라보는 고정된 눈
  • 공간의 수학적.기하학적 재현
  • 소실점 중심
    • 객관적 이성적 시점
  • > 인간이 자연 바라보는 주체.자연은 인식-재현의 대상._주체와 객체의 대립
[동양 삼원법]
  • 복수 시점
  • 산을 걸어 다니며 체험한 눈
  • 공간의 경험적 정신적 재현
  • 기의 흐름과 여백 중심
    • 주관적 철학적 시점
  • > 인간이 자연 속에 들어가 있는 존재_자연은 정신이 머무는 체험 공간_주체와 객체의 통일
[삼원법]_산을 보는 세가지 시점
  • 고원_아래에서 산꼭대기 올려다봄_시점;앙시_색감;청명_맑고 드높음_분위기;웅장함.숭고함.경외감
  • 심원_앞산에서 뒷산을 엿봄_시점;투시(부시_부감.과 투시.의 복합)_색감;중회.깊고 어두움_분위기;신비함.무한함.여운_[중첩된 공간감]
  • 평원_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봄_시점;평시_색감;명회.밝고 흐릿함_분위기;광활함.여유.고독_사대부 미적 감수성과 가장 부합_담박_[세계를 보는 시적 정서]
삼원법 통한 단일 시점의 극복
멀리 갈 필요 없이.삼원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지지체-형상-공간/바탕재-표면-도상-요철(손-그리기)/화면-표면-도상(붓.안료-그리기)/감상.
[고원]-[심원]-[평원]-[여백]을 변용.차용할 수 있을법한 경우의 수들...
지지체-형상-공간-고원+여백?/바탕재-표면-도상-요철(손-그리기)-평원?/화면-표면-도상(붓.안료-그리기)-심원?/감상-여백?  당대의 여백은 어떻게 접근.이해.주장할 수 있을지.우선적 고민 필요할 듯.
삼원법을 변용.적용.차용.할 수 있는가.

[그리기 방법]의 당위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개별 장면이 화면에 도상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선적.평면적.도식적.형태로 환원하는.그리기 방법을 택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유효할.적합할 듯 하다.
미사여구-사족의 재현적 그리기보다는.단순화하기.덜어내기.  그에 적절.적합한 것으로 [색채]를 다시 생각해보기.활용하기
Doesn’t matter though를 복기하며.


@의 카카오톡 메신저 프로필 사진은 김윤신 선생님의 사진이다.합이합일 분이분일.90대 노년의 작가가 한겨울 야외애서 전기톱을 들고서 나무를 써는 장면.과연 누가 그분의 진심 여하를 의심할 수 있을까.
살면서 직접 볼 수가 없는.뒤에 누군가가 있음.에 불안함.을 느낀다는 것.-거울단계.분열.편집증적 인식.나르시시즘-타자에의 욕망.투사-시뮬라시옹.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려놓은 [ldrLrLr].언어.기호.체계.본다.이해한다.유희한다.혼동한다.함의한다.제시한다.드러낸다.암시한다.숨긴다.보인다.보여준다.보여진다.다시.본다.
[목적지]-[체화]의 문제.

재귀적으로.하나하나.다시.처음부터. 상정 가능한 모든 과정-지표들에 대해.
작업으로부터 한걸음 멀어져서.가능한한 객관적으로.바라보기.분석.원인 찾기.파헤치기.파고들기.자기객관화.반성.뉘우침.의 연속.



<내일 no.16_오지 않을 내일을 위해 인디언식 기우제를>/Tomorrow no.16_A rain ritual for a tomorrow that may never come
내일 no.16의 지표들. 그 당위에 대해.
무엇을-어떻게-왜.
발화/메세지/의미/(시각)언어-형태-지지체-바탕재-장면-화면-그리기 행위-붓질-그리기 방식-도상-형상-이미지-스케일-비워냄-두께-표면-부피/양감-보여짐-보여짐의 방식.
각 지표들에 대한 당위-입장-’왜’
각각의 존재 이유-필요-기능을 우선적으로 검토하고. 불필요하다면 소거-생략-축소. 반대의 경우는 극대화-강조의 방식을 모색. 어떻게 유의미한 소통의 매개-시각 언어로 가닿게 할 것인가
발화하고자 하는 바가(진정) 무엇인지. 그것을 명확히 하는 것부터.
(혹은 진정 발화하고자 하는가-단지 붓을 휘두르기 위한 명분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무언가 말하고자 함이 있는가-소통의 욕구/욕망이 있는가_진심으로)



[색채]에 대한 당위-[그리기]에 대한 당위-[방식]에 대한 당위-[표면]에 대한 당위
빛을 그린다.고 말해왔다. 눈이 시지각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부터. 처음에는 명확한 윤곽선의 형태. 그리고 보는 행위(일단은 시지각에 한해)가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로 하는 ‘빛'. 빛을 어떤 유기체들의 군집처럼 패턴화.윤곽선으로 모여드는 식의 그리기 방식. 이때는-이는 대략 5년간 업으로 삼은 문신이 작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탓일 터. (문신을 하기 위한 그림-도안을 그릴 때에는 아주 명확한 윤곽선-먹선을 필요로 한다. 더군다나 내가 했던 것은 이레즈미라는 장르였기에 더욱이) 이후 언젠가(짐작컨데 석사 진학을 기점으로) ‘윤곽선’의 필요성이 부재함을 자각한 후로부터 정직하게 ‘먹선’을 따지는 않는다.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 대상을 분별하는 데에 필요한 것. 대상-형태-윤곽을 드러내는 빛-눈 사이 일련의 과정. 기존의 먹선-윤곽선의 그리기 방식은 만화적임/삽화적임의 특징을 산출한다. 먹선-윤곽선 대신 선택한 것은 재현적(상대적으로) 그리기 방식. 기존의 특정 도상이 그려진 것에 ‘선'이 소거된 형태. 앞선 그리기 방식의 [평면적임]을 유지한 것으로의 [재현적임]의 그리기 방식이다. ‘회화적임’의 대척점이 ‘재현적임'이라 할 수는 없다. ‘재현’이라 함에 있어도 그 표면은 재현적일 지라도 어떤 맥락에서 접는하는가-보는가에 따라 재현적이 아닐 수도, 또한 마찬가지로 통상적인 ‘재현적임'의 특성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표면 역시 다분히 재현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무엇을 재현하는가]를 논할 때.
색채에 대한 당위. 에 대해 생각하다 [바탕재]-[그리기]-[방식]-[표면]의 당위를 떠올린다. 기존의.주어진 기성의 것이 아닌 직접 제작한 바탕재. 그것과 그리기 행위. 그리기 방식. 색채. 어쩌면 그 일련을 아우를 수 있는 것-방식.
빛을 그려보자.그리기 행위 이전에 바탕-종이을 직접 제작 하는 것. [부조]에 가까운 방식으로. [장면]을 [도상]으로 옮겨내는 것을 그리기 행위 뿐아닌, 그 이전에. 그러한 방식을 고려한다면 [그리기]-[색채]의 경우는 붓질이 아닌 손짓이 만든 요철-윤곽-도상.그에 적합한 방식으로 축소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무엇이 보여질 것인가.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빛을 그린다 할 때 보다 책임감을 담지한 방식일 수 있는가. 매체당위성. ‘그리기'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창작자의 손의 연장으로써 붓,붓을 안료와 함께 휘둘러 무언가를 시각화하는 것. 바탕-종이 제작 과정. 부조-요철을 만들어내는 정도-방식에 따라. 바탕 제작 행위  라고 하는 것이. 창작자의 손이 연장되기 이전에 휘둘러지는 것으로.
그리기 라 하는 과정에 포함-편입될 수도 있을것.그리하면 바탕을 직접 제작한다는 것의.매체 당위성이라 하는 것.나의 입장(혹은 주장)이 [자기합리화]로부터 멀어 질 수 있는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것도 같다.
혹은 도상의 중첩 이라는.기존 화면 구성의 방법론.손-그리기.의 도상과 붓-안료-그리기.의 도상을 중첩한다거나.충돌하게끔 한다거나.등의 방법도 떠올릴 수 있겠다.
색채에 대해 마땅한 당위가 없다면.그저 지어낼 뿐이라면.사족에 불과하다면.차라리 소거-생략하는 것이 나을까.
나의 작업에서 [색채]라 하는 것은 어떤  기능-역할을 지니는가.그에 대한 나의 입장-주장.



[당위]-[작업에 온전히 책임을 진다는 것]-[작업 앞에서 떳떳할 수 있다는 것]-[솔직한 작업]
Z축에 대한 당위. 지지체에 대한 당위. 바탕재에 대한 당위. 붓질에 대한 당위. 비어있음에 대한 당위. 부피에 대한 당위. 보여짐에 대한 당위 
각각의 지표에 대한 당위를 설정하는 것. 각각의 요소에 ‘왜'라는 질문에 대한 본인의-본인만의-빌려온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닌-솔직한-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창작자/화자/창작 주체/(혹은 작가)로서 본인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는 것-온전히 책임을 다하는 것-꾸며내지 않은 것으로-그리하여 떳떳할 수 있는 것
(꾸며낸)그럴듯함과 자기합리화 따위가 아닌 것으로.



[조급함]에 대해
최근들어서는 어떤 ‘조급함' 내지는 ‘조바심'을 덜어내려 하고 있다. 다만 그게 도피-회피의 형태는 아닌
작업을 하는 것에 있어 전반적으로. 태도 등의 것들 뿐아니라 작업 자체에 있어서도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작업에 드러날 수 밖에 없음을, 또 그것이 썩 좋게 작용하는 것도 아님을 느낀다.
아무래도 2023년 무렵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근 2~3년간 나의 [조급함]은 정도 이상이었던 것 같다.
요즘은 다소 투박하더라도 솔직한 작업이 좋다. 솔직한 작업을 하고 싶다. 솔직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제일 많이 하는 것 같다.
나 자신이 작업 앞에 떳떳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그럴듯하게 설정한 [당위]들로 포장하고 꾸며내고 끼워맞춘 것이 아닌 것.
그런 것들은 어떻게서든 티가 날 수 밖에 없고, 작업을 공허하게 만듦을 여실히 느낀다.
그래서 스테이트먼트에 그동안은 숨겼던 것-의도적으로 숨겨왔던 내용-진부한 것 일 수도, 혹여 누군가에게는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비춰질 여지가 있는
‘나'-’나르시스트'-’양극성장애'에 대한 부분을 추가했다. 다만 그것 역시 100% 솔직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진심으로 작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솔직함]에 다가서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소통의 문제 .  [시각 언어] .  [언어]  .  [보기]
끝없이 스스로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내게 숙원과도 같은 천만아트포영 공모 삼수 끝에 처음으로 1차를 합격했으나 2차 면접에서 소통의 문제를 포함해 총체적인 나의 부족함으로 사수를 하게 되었다.
심사자는 테이트모던의 큐레이터. 나의 영어 말하기 실력이 그리 유창하지 않았기에. [조급함-소통-작업]의 문제 삼박자.
[언어]의 장벽 이전에 나의 작업이 [시각 언어]로써 썩 유의미하게 기능하지 못했던-가닿지 못했던 것. 복기하자면 그렇다.
한동안 너무도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준비한 면접, 면접 직후 “아 안되겠구나"를 직감한, 면접 당일은 많이 허탈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했기에 후회는 없다.  
포트폴리오를 영문 버전으로 준비해갔다. 기존 작업노트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말이라는 것이 아 다르고 어 다르듯 한글로 작성한 작업노트를 다른 언어로-기존의 뉘앙스로-의미로 전달 가능하게끔 번역하는 것. 쉽지 않았다.  소통의 문제.  
과정에서 내가 작업의 주제라고 주장하는 ‘보는 행위'를 보함해 내 작업-나에 대해-[언어]라는 것이 얼마나-어떻게-어떤 영역을 차지하고-작용하는지_조금은 더 알 수 있었던-유의미한 과정이었다.
‘이미지image’라고 하는 것을_수집단계에서는 ‘장면scene’-화면에 그리기 행위로 옮겨질 때에는 ‘도상pictorial image/painted image’로-최종적으로 무엇을 환기한다는 차원의 ‘이미지image’로



“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본다는 것에는 인식과 존재, 욕망, 그리고 권력의 문제가 개입한다. 영어에서 ‘내가 본다(I see)’는 말은 눈의 지각뿐 아니라 뇌의 활동도 뜻한다.
시각은 인식과 직결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인식론은 일찍부터 눈의 문화를 중요하게 여겨 왔다. 오늘날 ‘시각철학'이란 분과가 있을 정도로 철학에서 시각의 문제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가장 큰 주제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시각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미술에서는 보는 것이 핵심적이다.
[대상을 보는 주체의 시각과 보는 방식의 문제]는 미술의 근본 구조를 형성한다. 미술이 철학의 눈이라면,철학은 미술의 뇌나 마찬가지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자신의 글 「눈과 정신(Eye and Mind)」 에서 제시하듯, 시각과 사유는 몸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며 미술과철학은 시각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긴밀히 얽혀 있다. “_눈의 폄하_마틴 제이_역자 서문 중
 


[날 때부터 주어진 이름_문성진/Moon Seongjin]이 아닌 [직접 지은 별도의 활동명_문민/Moon Mean]을 쓰는 이유
작업의 근본적인 출발점/의문/의구심/간극/불신
그리기 행위 이전에 @가 개입한 최소한의 근거를(@의 몸, 시간, 과정_흔적의 형태로) 확보하는 것_표면
[주체성]-[당사자성]-[매체당위성]
나의 개입-’나'의 개입
때로는 그것이 정말 고될지라도, 그렇게 해야지만 내가 납득할 수가 있다는것(적어도 지금은)
비록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자기합리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유연하지 못한 갇혀있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더라도



[자체제작 종이 Handmade paper]-[붓질]-[당사자성]-[매체당위성]-[평평함과 부피]-[스케일_회화/조각]-[작은 스케일_가늘고 긴]-[큰 스케일_?]

좌대.제단.무덤.이집트 조각.집.바위.암석.  [암석~제단~좌대]의 중간값?
’좌대'라 하는 것이 함의하는 것. (미술사적 맥락에서의) 의의 
로뎅의 조각. 무거처성/무장소성. 고대의 조각은 장소에 귀속되는 것-조각과 좌대(라 칭하는 것이 적절할까 싶지만,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반듯한 그것)가 일체-한 몸인 구조.
디스플레이용 구조물에 별도의 의미부여/미사여구를 덧붙어 제작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전시 단위에서는 유의미하게 풀어낼 수 있음. 다만 페어는? 굳이? 그냥 연습-습작 삼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너무도 중요하다. 근데 어렵다. 반듯한-익숙한 좌대/스텐 봉-구조물은 간편하고, 그 위에 올려지는 작업을 그럴듯 하게 만들어준다.
반듯한-익숙한-전형적인-정형의 것을 벗어나는 순간 [조악함]과 [굳이?]를 수반하기 십상이다. 동시에 가능한 선택지/새로운 가능성도 그만큼 많아지긴 한다.
작업의 [무엇을-어떻게-왜]와 적절히 맞아떨어지는 디스플레이의 [무엇을-어떻게-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뻗어나갈 수 있는 많은 가지들을 생각해보자.
2024년도에는 작업의 연장을 가장한 좌대-영화 인간지네를 보며 떠올렸던 것-[작업+작업과 동일한 지지체에서 떠낸 껍질*2ea]의 3단 구조 -  조각의 용법을 차용한다는 지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시도했었다. 다만 딱 그정도만의 의의가 있었던 것 같기도. (매체-형식-매체...메인 작업보다 내가 매몰되 있는 그것들이 눈에 먼저 들어왔을 것, 혹은 그것밖에 안 보였을 수도) 당시에 회의적인 반응이 주를 이루었으나 거기서 디벨롭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지식의 망치에 호되게 맞아가며 나름대로 많은 것을 습득한 지금의 나로부터는 어떤 것으로 다시금 만들어져 나올 것인가.
무게중심의 문제는 작업 자체에서 해결되는 것이다. 서는 껍질. 그렇다면 중요한 것인 결과물의 시각적인 쾌-그리고 제작의 당위
이미 홀로 충분히 서는 껍질에게 별도의 좌대/구조물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번째로는 의도하는 감상의 적절한 높이가 있다. 바닥에 떡하니 놓고싶지 않다. 두번째로는 연말에 하게 될 개인전의 기획. 그 기획에서 좌대/구조물이 제작의 ‘당위'가 있다.
작업 과정에서 지지체로 사용하는/마지막에는 작업과 분리되어 떨어져 나오는 스티로폼이 있다. 자의/타의에 의해 바뀌어버린 연작의 이름-<내일>은 본래 <Ldrlrlr>이었다.
껍질만 남은 형태의 작업으로, 거창하게도 발디딘 세상의 속모습에 질문한다 표현했었다. 기념할 만한 허물일 수도/그저 껍질-외피만 남은 것일 수도 있는 작업이라 했었다. 여전히 유효한 말들이다.
허물-껍질-외피-집-무덤-제단-이미지-조각-좌대-신전-공간-표면-도상-주체-자립-이미지-암석-유적-믿음
‘믿음'의 구조물 - 유사 OO - @하게  ‘보이는 듯’ 하지만 결코 @하지만은 않은 것?
내가 작업에 부여하는 실 없는 부피감/양감이 있다. 화판에-벽에 붙어야 할 종이가 휘어지고 굽어지며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은 어디에 올라가야 할 것인가. 작업-공간이 올라갈 그것에는 무엇을, 어떻게-왜 부여할 것인가. 더해서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게끔/느껴지게끔 할 것인가. 아무래도 양가적인 어떤 느낌들이 될 것 같다.
이를테면 숭고하면서도 어딘가 괴이한/불쾌한 골짜기/공허한/(B급 감성?)...따위의 것들.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 같다.  



‘내일을 복기한다는 것’ 2026년은, 끈덕지게/지독히도 나를 물고 늘어지는 [내일]을 복기하는 일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내일>이라는 작업이 무엇인지/어디를 향해야 하는지/왜 하는 것인지/’내일'이라는 것이 (내게) 무엇인지/나는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오지 않을 내일 위해
@는 내게 중심을 잘 잡으랬다. 그 [중심]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 껍질의 무게중심을 잡는 일, 동시에 나의 중심을 잡는 일.
현실세계의 법칙, 그리고 [믿음]
내 세계의 법칙, 나의 현실을 지탱하는 것
부피감/양감은 있으나 그것을 이루는 것이 없다는 것
그럴듯한/공허한 부피감/양감과 [믿음], 내부/지지체의 행방, 피상적인/그럴듯한 외관
불필요한 @을 지워내어 표면만을 남기는 일
붓을 휘두르기 위한 이미지-그것의 [납작함]/[동시대성]



서사_제작자의 의도와 설정으로 말미암아 @하게 되는 이미지_이미지에 대한 것
- 260221 -



<내일>이라는, 본래 <ldrLrLr>이라 이름 지어주었던 작업은 평면 작업에 비해, 그 공정상 하나의 작업을 완결짓기까지 몇 곱절의 고민을/시간을/공력을 요한다.
그만큼 [구상~작업 진행~완성] 의 시간/과정을 거치다 보면 무엇을 그리려 했던가/무엇을 말하고자/드러내고자/이것을 매개하여 무엇을 발화하고자 했던가 망각할 때가 있다.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순간이 있다.
한번 붓을 들면/붙잡으면 잠깐의 휴식을 위해 다시 내려 놓기까지의 호흡이 길다_상대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그리고자 했던가/그려내고자 했던가/만들어내고자 했던가/보여주고자 했던가/누가 될지 모를  @에게 어떻게 가닿게 하고자 했던가.
긴 호흡/과정/시간 속에서 희석되지 않게끔/퇴색되지 않게끔/망각하지 않게끔. 다시금 되뇌이고-떠올리고-복기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나는 무엇을 하는 @인지에 대해.
잠깐이나마 조바심/욕심을 내려놓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기.
작업이 산으로 가지 않도록. 나의 일이 무의미한 몸부림이 되지 않도록.
- 260220 -



오르락/내리락/오르락내리락/덜컹/쿵/터억/오르락내리락/털썩/아등바등...
@가 가진 유일한 두려움은 끝내 도달하지 못할 @에 대한 두려움
[타인]_내게 타인은 무엇인가. 타인/타자/객체...들이란 어떤 의미/존재인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양극성장애를 지닌 나르시스트에게 타인이란 어떤 의미-가치-존재인가
[타인]을 경유한 이미지-도상들이 하나되어, 결국 [나]로 귀결되도록_[이미지에 대한 것]
끊임없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증명-확인해야하는/3인칭에 가까운 시점의 삶을 살기에 알 수도 없고 종종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나]의 ‘서사'는 [이미지에 대한 것]에 있어 [타인]을 필요로 한다.
[도상-표면-공간-감상] 따위의 그럴듯한 구조/분석을 차치하고서, 그 이전의/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그러하다.
버티는 것/부서지는 것/견디는 것/견뎌야만 하는 것/남아 있는 것/남겨진 것
[미장아빔]-[수면]-[반영]-[뒤틀림]-[교차]
Ni dieu ni maître, ni moi.
[서사]라는 단어에서 [이미지에 대한 것]으로.
이미지 수집의 방식.
이미지 수집 방식을 건드리기/더 파고들기(정말 딥하게)/다시 추적하기
탐구해볼 필요가 있음. 그러면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을 것.
(돌고 돌아)결국 작업이란 본인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결론.

왜 현실에서는 못하고, 가상의/웹의/SNS의 이미지를 가지고 왔는가.
또 어떻게 가지고 왔는가.

보는 이에게 긴장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작업을 봤을 때의 궁금증의 순서가 있을 것
예컨대 소실점. 이 풍경. > 시각/관념/환영...다 차치하고서 왜 이 풍경이어야 했는가. 왜 이렇게 그려져야만 했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수집했는가. 왜 그렇게 수집하는가.
그리고 이것을 돌아가면서 보는 것  >  매체
그리고 그것이 비어있는 것. >  매체+@

전시 설명은 작업 설명과 다르다
하나하나(의미부여는 아니지만)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회화와 세계의 겹과 결... 세상의 두께를 그려내기를 열망한다. ... 눈으로 보는 세계에서 몸으로 그리는 회화로 건너 가는 일은 목숨을 건 도약과도 같다. 그만큼 세계와 회화 사이의 거리는 멀다. 세계와는 또 다른 회화의 세계에서, 언젠가 유근택은 분수와 폭죽처럼 절정을 향해 치솟아 터질 것이고, 정용국은 구름과 폭포처럼 허무를 향해 흘러가고 쏟아질 것이다. _최석원, 전시서문 '겹과 결' 중에서
겹과 결. 회화와 세계. 나의 일.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붙들고서 놓지 못하고 있는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다소간의/잠깐의 감흥과 쏟아지는/뒤덮는 허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일이 무의미한 몸부림이 되지 않도록.

[진정성]과 [진심]의 차이
다시 또 텍스트에 갇히진 않았는가.



[서사]와 나의 [위치/포지션], [서사의 부재]와 [작업의 공허함], [address form]

[공허한 작업]과 [좋은 침묵을 가진 작업]
‘아무도 않지 않는 빈 의자'와 ‘누군가 머물다 간 흔적/기척이 남아 있는 자리'
드러내기 대신 남아 있게 만들기
-왜 이 크기인가
-왜 이런 형상인가
-왜 이 정도의 두께인가
-왜 비어 있어야 했는가
-왜 이 도상이 반복되는가/선택되었는가/중첩되었는가/조합되었는가
-왜 하필 ‘내일'인가
Why/Why/Why/Why/Why/Why/Why/Why/Why...
‘이미지가 형성되려다 멈춘 상태', ‘이미지'는 끝내 특정되지 않은 채 잔존하도록,
‘이미지'는 @을 환기하지만 그 @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규정할 수 없도록, ’이미지'가 기표화/읽기-해석-의미화의 루트로 들어가지 않게/서술적 의미에 흡수되지 않게
기억같지만 기억은 아니고/풍경같지만 장소는 아니고/상징같지만 의미는 닫히지 않은, 여지가 남은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러나 이미 영향을 미치고는 있고.



[풍경], [그럴듯한 풍경]
- 이미지로서 먼저 소비된 풍경
- 이미지 아카이브에 속한 장소, @의 기억/경험X
- 기억 없는 그리움/노스텔지어를 발생시키는 풍경
- 원래부터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장소/대체 가능한 장소
- 실제로는 한번도 [지금, 여기]가 된 적이 없는 장소/결코 도착하지 않는 장소

[막], [풍경], [보기]
풍경을 본다/근데 뭔가 앞에 하나 더 있다/창 같기도, 문 같기도, 스크린도어 같기도 하다/이게 풍경의 일부인지, 구조물인지 애매하다/보고 있는데, 동시에 가로막혀 있다
상징x, 설명 가능한 알레고리x
완전히 가리지도 않고/완전히 열리지도 않고/통과 가능한지도 확실치 않고/계속 앞에 있는 것으로만 존재하는 [보는 행위]를 지연시키는 구조물/지각은 항상 중계된다

내일은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항상 ‘곧’에 머무른다.
문은 있다/창은 있다/밖은 보인다/풍경은 그럴듯하다/근데 아직 아니다/아직 통과하지 않았다/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직의 지속]과 [서사]
[문/창/스크린도어/막]
통과할 것 같지만 통과하지 않는다/곧 도착할 것 같지만 계속 앞에 있다/열리지만 지금은 아니다/항상 ‘곧'이지만 끝내 ‘지금'이 되지 않는다/공간 장치이지만 실제로는 시간 장치이다
[서사]와 [작업이 지나온 경로/흔적], [why-선택-이유의 잔여물]



[형상의 시간감]-되려다 만 상태-중간에 멈춰 있음/이미 끝난 것도 아님/아직 시작한 것도 아님-그런 것들이 형상 전체에 깔려 있는 것, 형상이 만드는 시간의 상태
하루가 있다/해가 뜨면 아침이다/해가 질 때까지 낮이다/곧, 해가 진다/달이 뜨면 저녁-밤이다/해가 뜨기 전까지-달이 저물기 전까지 새벽이다/곧, 달이 저문다/다시 해가 뜬다/아침-낮에는 해가 떠 있다/저녁-밤-새벽에는 달이 떠 있다/아침-낮은 밝다(대체로)/저녁-밤-새벽은 어둡다(대체로)/문이 없는 지하철역으로 간다/지하철역에 들어선다/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다/계단으로 내려간다/한번 더 내려간다/개찰구를 통과한다/다시 내려간다/사람들이 있다/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끝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같은 장소-서로 다른 하루 속에 있다/불빛이 환한 역 내부에서 밤낮의 구분은 모호해진다/벽-바닥에는 반복되는 타일들이 있다/스크린 도어가 있다/지하철의 도착을 기다린다/스크린 도어에는 시가 쓰여있다/스크린 도어 너머에는 어두움-철길-보이지만 가로막힌, 갈 수 없는 장소가 있다/지하철이 도착한다/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곧, 문이 열린다/타고 있던 사람들이 내리기를 기다린다/지하철에 올라탄다/앉을-머무를 자리를 탐색한다/눈을 감는다/출발을 기다린다/곧, 지하철이 출발한다/흔들린다/덜컹덜컹/부드럽게 전진하는 듯하기도/서서히 멈추려는 듯하기도/급정거하기도/진동-흔들림-움직임-가속-감속을 느낀다/기다린다/도착한다/기다린다/출발한다/기다린다/도착한다/공간 속의 사람들이 교체된다/흔들린다/멈춘다/곧 도착할 듯 하다/근데 아직 아니었다/감속, 거의 멈추어 도착한 듯 했으나 다시 흔들리며 가속, 조금 더 간다/불규칙한 지하철의 움직임-진동-리듬을 느낀다/도착한다/출발-기다림-도착한다/목적지-역에 도착한다/스크린 도어가 열리기를 기다린다/곧, 스크린 도어가 열린다/내린다/반복/반복/반복/반복/반복/반복 아닌듯한 반복/반복/반복이면서 반복이 아니기도/아닐수도
덜컹덜컹/스무스/덜컹-스무스-덜컹/스 덜컹 무스/덜컹 스 덜 무스 컹/스 덜 무 컹덜컹 스/의 형상
This is tomorrow/Tooomorrow/Tomorrow in delay/Tooomooorrow/Tomorrow-still tomorrow/So-called Tomorrow/Tomoooorrow
- 반복/백야/형상/우주/지하철/풍경/현상/공허/표면-형상의 리듬/시간 감각/내일/연결
- 이미지(도상)을 ‘풍경이 되려다 실패하는 상태'로 만들기_최종 작업의 이미지(@을 환기하는 것으로써)
- 쉐입의 어긋남
- [전체상]에 대한 저항
- 항상 지시되지만, 결코 포착할 수 없는 것
- [공허함을 말하는 것(인류 보편적-감상적인 차원x)]이 아닌 [공허함이 생기는 시간의 형태를 말하는 것/구현하는 것]
- 도착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
- 시간을 해석하게x, 시간 안에 머물게 하기
- ’보기'로 말미암아 ‘둘러싸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
-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상태]를 구현하는 것
-스케일이 무너진 상태의 이미지, 거대함과 미세함이 동시에 작동하는 상태
-노트북/핸드폰 스크린-화면에 묻은 얼룩, 혹은 부스러기. 햇갈리게 하는 것. 방해하는 장치(ex. 특히나 포토샵할때 겪는 뭐 그런)



파도 소리에 묻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 더 이상 전체의 부분이 아니지만, 여전히 중력의 끌어당김에는 저항하는 것
  • OO은 침식으로 인한 연속적인 변형 과정에 놓여 있다. 아무리 견고해 보여도 그 OO은 영원을 가장한 일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결국 그리고 필연적으로 OO은 파도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 환영적 공간과 일시 정지된 순간의 드라마
  • 바다에서 강으로, 강에서 고인 물 웅덩이로, 하수구로, 하수구에서 바다로, 다시 강으로, 혹은 물 웅덩이로
  • 강에서 하수구로, 하수구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고인 물 웅덩이로, 다시 바다로, 혹은 강으로
  • 하수구에서 고인 물 웅덩이로, 물 웅덩이에서 바다로, 강으로, 강에서 하수구로, 다시 바다로, 혹은 물 웅덩이로 
  • 고인 물 웅덩이에서 강으로, 강에서 하수구로, 바다로, 바다에서 물 웅덩이로, 다시 하수구로, 혹은 강으로



< [도상] + [표면] + [공간] + [감상] [이미지] >의 구조

‘작가’란 일종의 현상이다. ‘나‘라고 칭하는 것과 ’자아‘ 는 결국 유동적인/유연한 패턴. 거울을 볼때마다 내가 가장 크게, 혹은 빈번하게 느끼는 것은 다름아닌 ‘어색함’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적확한 수식어로 설명하기 힘든 매개/현상으로써 존재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부인할 수 없는 물리적 작용의 흔적을 지닌채로, 변화를 잠재하는 나의 작업은 보다 본질적인 ‘나’에 해당하는 무언가이다_[거울에 비친 그럴싸한 껍데기/육신]-[정제되지 않은 형태의 파편들이 알 수 없는 구조로 뒤죽박죽/얼키고설킨 머릿속]의 집합으로써의 ‘나'에 비해. 적어도 내 작업은 정교한 언어로 규정하기 보다 모호한 선문답의 형태로 제시하고 싶은 바램이다. 또한 그것으로 유효할 수 있기를. 



[지금, 여기] 에 대해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장소‘, 삶이라 부르는 일상의 모든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시간-공간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것인지, 애초에 그런 흐름 따위와는 별개의 인과로 어느 순간 덩그러니 남겨져버린 것인지.
빛은 존재하는 순간, 일말의 속도 변화 없이 빛 본연의 속도로 나아간다. 빛은 정지할 수 없다/정지하지 않는다. 빛은 단 한번도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든 버티면 하루는 오고, 그 하루를 오게 하는 빛은 생을 잇게 하고야 말고.
그 누구도 본 적 없으나, 숨 쉬고 사는 누구나 찾아오리라 믿는 것 — ‘내일’은 존재한 적 없으며, 늘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나는 여전히 남아있다.



회화는 여러 매체들이 등장해도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조각은 실제와 감각을 경쟁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스스로를 현상으로 바라보는 것.
그렇다면 조각/설치의 용법을 차용하는 메타회화(회화 기반의 부피를 지닌, 벽에서 내려온 어떤 것)는 매체 자체에 대한 고찰의 차원에서 어떻게 접근하고 바라볼 수 있는가.

  • 박이소는 자기작품을 "부족함과 미완성을 긍정하면서 답답한 한계를 시원하게 넘어서려는 자포자기적인 희망같은 것" 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가장 고귀해지는 순간이 고차원의 유머를 구사하고 이해하는 때"



‘여덟번째 날'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OO 혼탕', ‘OO Melting  Bath’, ‘자아 혼탕', ‘Selves Melting  Bath’, ‘Ego Melting Bath’, ‘Will to silence_침묵의 의지'
“무언가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내러티브가 없다면, 관객은 반대의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본다는 행위]가 부여하는 즉각적/감각적 경험에 보다 집중 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작업은 단일 오브제나 장면보다는 태도’, ‘형식’, 그리고 삶과 감각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존재의 감각 자체를 더 중요한 문제로 삼는 것인가
아무리 헤집어도 늘 빈칸 뿐인 시간을 채우는 것
찰나를 영원으로 바꾸기 위해

현재라는 시간성이 현실을 이루는 방식을 통찰하는 것

세상을 단일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로 보는 게 아닌, 끊임없이 변주되고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리듬과 패턴으로 보는 것
완성된 이미지로서 완결되지 않은 것을 만드는 것. ‘붓만 굴리는 것’과 내가 ‘내 화면에 책임을 지는 것’. ”작업에 즐거움이 빠지면 노동밖에 남지 않는다“
언어 이전의 형태, 형태 이전의 형상.   원근, 대상, 대상과의 거리, 대상이 되는 것, 응시, 시선

그림으로 하여금 조각으로 비춰질 수 있게끔 하는 방식/조각으로 하여금 그림으로 비춰질 수 있게끔 하는 방식
‘회화성’/‘조각성’ 이란 무엇인가. 둘 사이의 조율-줄타기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That’s life.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하지



형상으로 감싸진 비어 있음이 오히려 본질이 되는 것. 형상이 무엇을 채우는가보다 그것이 무엇을 남기는가, 무엇을 비워두는가.




1. 본인이 생각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2. 왜 나는 예술을 해야만 하는가?
3. 나의 예술로 타인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4. 나의 작업이 사회나 예술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거나 기여할 수 있는가?
5. 현재의 나의 방법(기법, 접근법)이 자신의 예술관 및 예술목적에 부합하는가?
6. 사용하는 매체(회화, 조각, 사진, 영상, 오브제, 텍스트, 설치)는 본인의 작업에 적합하고 타인과 차별점을 둘 수 있는가?
7. 작업에 대한 접근법과 제작방법론이 타인과 대별될 수 있는가?
8. 자신의 작업과정과 절차를 기술하시오 (자신만의 도식으로)
9. 왜 현재(현재의 화면구성 측면과 디스플레이 측면에서)의 포맷을 사용하는가?
10. 왜 이러한(현재 작업의) 컬러를 사용하는가?
11. 자신의 작업은 미술사와 어떠한 맥락성을 지니는가?
12. 자신의 작업은 동시대적 현안을 다룰 수 있는가?
13. 예술은 꼭 타인과 소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리좀]_다수의 출입구의 비계층적 지식 네트워크, 시작도 끝도 없고, 정해진 길도 없으며 경직된 구성/지배 개념에 저항, 이종적 요소를 연계시키는 능력 지닌 사상/연구
‘리좀적 작품'-’리좀적/비선형적 연결'
-  인위적 통제, 계층적 구조 없이도 모든 것 연결시키는 것
-  다양한 출처의 개별 단위들 총체로 ‘연결된 무언가’ 연상시키기
-  제각각인 단위체 사이 시각적/심리적/철학적 연관성-의미 부여는 관객의 몫
-  뜻밖의 병치/접속/분열/다양성
-  “장르/주체의 경계 뛰어넘으면서, 지식의 망이 섭렵하기에 너무 넓고 복잡하더라도 ‘접속'은 항상 존재 가능"

* 의미가 열려있을지라도, 내용은 여전히 중요하다"

[정체성 Identity]
-  개인으로서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것 뿐만 아니라 집단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누구인가 질문하는 것
-  거주 공간의 이동/변위와 정체성
-  ‘장소'에 결속되는 정체성
‘Otherness’
<Fluid identity  유동적 정체성>
All in all is all we are...[@+@’+리좀] 으로서의 이미지 구성
‘Post-Human’ 과 ‘Being way too human’
지연
/유예/약속/불확정성/무한 미루기/자아의 경계/버티는 것의 윤리
* 관객으로서 이미지의 흐름 사이에 있는 빈 공간을 점유하는 것
* 동시에 양쪽을 볼 수 없기에, 어느 쪽을 보고, 포기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것 - 완전한 감상이 불가능하다는, 관람에 있어서의 무력함 - ObDachlos_입방체 회화의 관람 방식
* ObDachlos_각진 모서리와 그에 따른 두 면을 지닌 입방체 형태. 각각의 면에는 상이한 이미지가 그려져 있을 것. 양쪽 면을 동시에 온전히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리좀적/비선형적으로 어떻게든 연결-접속된 상태일 것.
연결된 부분들의 총체가 어떠한 ‘내러티브’ 따위의 것 일수도, 아닐수도...불확실함을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구조.   동전의 양면은 한몸. 어느 면을 드러내는가의 차이

충족되지 않는 것을 향한 형상화, 사라진 것을 붙잡으려는, 그러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몸짓. ‘환유'의 방식, 부분으로 전체를 표상하기
‘빈 용기 Empty Vessel’



[실연하는 몸 Body]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What will Become of Me?>
* 관객이 신체적 행위의 흔적 인지할 때, 어떤 의미를 추론할 수 있는가"

[시간 Time]
-  ‘내러티브' 없는 연속
-  시작/중간/끝을 가리키는 줄거리의 부재
-  “목적도 결과도 없이 그냥 일어날 뿐"

[육화 embody] - [재현 represent]
<일이 일어나는 방식 The Way Thing Go> ‘연속된 시간'의 육화
<폭발 실연 Demo> 순간의 ‘찰나’를 재현-가시성 visibility 의 최극단 영역 
* [실제 사건 발생의 시간 - 작품이 묘사하는(정지된) 시간 - 관람자의 경험의 시간] 구조의 여러 층위로 시간의 국면을 다루는 것  

[기념비] : ‘사건’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구상/추상 조각
[다중삽화 형식] : ‘사건’을 내러티브 형식으로 같은 이야기에서 다수의 장면 재현

* ”[지금] [여기] 있는 [이미지]는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다"
* 여러 에피소드의 중첩

[동시적 시간 simultaneous time]
-  동시성 : 지속되지 않는 현재에 일어나는 모든 것 포괄
-  고대 신화 (꿈의 시간) ~ 인터넷 상 시간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동시에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정보의 흐름) 모두 포함
-  ‘순간'을 산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간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
-  시간은 감정(사건/특성)과 긴밀히 연결된 감정적 특질의 것으로 그 ‘지속’을 인식한다_’분위기 mood’

[시간의 구조]
-  ‘지속'
-  ‘속도'
-  ‘리듬'
-  ‘방향'
* ’충돌'/’혼돈'의 상태로 ‘시간의 파편'을 묘사하는 것 - 하이테크 시대가 정보/사건 제시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
* ’정보의 동시성/계속되는 과부하는 무언가'를 일관된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시대 (광대한 정보 저장된 전자 데이터베이스, 디지털 기술의 접근성)

[시간을 파편화하기]
* ’시간의 파편화' : 기억/꿈의 과정 비유적으로 담아내기 용이한 수단_기억/꿈 속에서 시간의 구조는 끊임없이 끊어지고, 의미는 덧없이 부유하기 때문
* 논리적 흐름/관계 설정x, 상이한 맥락의 이미지, 사물, 양식 병치/중첩시켜 ‘시간적 어긋남' 만들어 내는 방식
* ‘중첩 Layering’, 정답 없는 복잡한 수수께끼 조립하는 작업

[실제 시간 real time]
-  상업 영화/TV 통해 익숙해진 ‘인공적인 시간'에 대한 반작용
-  [사진 조합으로 어떤 풍경/대상 재현하는 방식] 과 [실제 우리가 풍경/대상을 보는 방식_조금씩 겹쳐지고 분절된 시선]
-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고 지시한 고정 속도를 유지할 것을 강요하는 영화/필름과 달리, 실제 세상에서 그러하듯 여유있게 바라볼 시간을 제시하는 것
-  관객이 재량껏 앞뒤 안팎으로 이동하며 본인 속도대로 감상할 수 있는 이야기 전달 방식 탐구

“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졌는가?”
* 현 우리 시대의 시간 감각은 전 세대에 비해 빨라짐
* “걷는 속도를 일부러 급격히 늦추면 느려진 보행속도와 관찰자의 몸에 내재된 익숙한 시간 감각의 충돌이 선명히 드러난다.”
* ‘시간 리듬' - ‘느림 slowness’ - ‘가속'
* 우리가 작품을 관람할 때는 매우 집중 상태, 미묘한 변화도 큰 의미를 지닌다
* “극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어떤 사건을 지켜보는 것은 [전체 구조]에 대한 감을 잃어버리고 [사건]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온전히 사로잡히는 경험"

[끝없음을 탐색하기]
* ‘끝없음 endlessness’  =  정신적 깨달음/초월적 우주의 무한x
                                     =  현대 (영적 가치 이후 post spiritual의 시대) 생활의 의미 없는 세부를 따분하게 되풀이하는 극도의 지루함-권태에 기인하는 끝없음
                                     =  신경증적 강박에서 쳇바퀴 돌리듯 반복하는 끝없음
                                     =  시작과 끝의 하나된 연결, 시작/종결의 구분x

* ‘왜'라는 설득력 있는 이유 찾기 - ‘동기'는 언제나 문제시되고 의심해야 하는 것

[벽화] - [공적인 담화 - 사적인 담화의 차이] - [크기/스케일_거대한 스케일에서 비롯되는 목소리의 증폭, 역사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목소리 낼 수 있게 만드는 것]
[’과거를 재활용’함으로써 ‘현재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방식’]
- 현재 = 과거의 유물을 개조한 것
- 양식의 급변, 잡종의 혼성체

[현재를 ‘재설정’하기]
-  우리가 현재를 이해하는 방식 변화시키고자 하는 결의
-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볼 때 시간은 무너져 내린다
-  한때는 현재였으나 이제는 과거인 시간이 또 한번 생생한 현재가 되는 것
-  현재는 새로운 맥락으로 나타나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다 비판적으로 보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_TV 뉴스/신문 보도가 진실이라 믿는 태도]  -  [우리 자신 ‘집단 기억’의 구성]  -  [매개 역할하는 ‘언어의 힘']
* ’자서전'과 ‘사회사'는 구분된 영역x,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  ‘문화'의 깊은 영향, ‘작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더 큰 공공의 사건' + 역사에 기반한 ‘사회적 관념'에 연루됨 (+@감정과의 결합)

[과거를 기념하기]
-  기념비 memorial (죽은 자에게 바치는)
-  기념물 monument (과거에 바치는)
-  정보화 시대-정보의 과잉이 ‘기억 과정'에 가한 커다란 충격
-  “데이터 뱅크와 이미지 트랙에 더 많은 기억이 저장될수록 우리 문화가 기억하려는 의지, 기억할 수 있는 역량은 줄어든다.”
-  “우리는 점차 ‘개인'이자 ‘공동체'로서 기억하는 능력을 포기하고, 대신 기술이 보충한 인공적이고 매개된 메모리 뱅크에 의존한다.”

[아카이브의 동시성 synchronicity] - 시간을 사라지게 하고 기억을 혼란시키는 상태
[시간적 정박 temporal anchoring]의 형태 (오늘날 사회에서 ‘기억'이 강조되는 현상_하이테크 시대의 기억상실에 대한 저항?)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물'을 제작하여 관객이 천천히 감상 가능한 형식으로, 사색할 시간 제공하고 우리의 ‘집단 망각'에 저항하기

* ‘시간'은 관객의 체험에도 중심적 요소_나 역시 내 작업 중 어떤 것도 고정된 사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기체에 가까운 어떤 것에 가깝다.
*  [개인적 여정/체험]  ⇒  [집단적 여정/체험] 으로의 이행, 나아가기
*  “과거는 현재 속에서 떠오른다"
- 스스로를 현재 안에 삽입하는 과거의 메아리_이때 원래의 모양/의미는 시간차에 의해 왜곡됨
*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던 세계관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  현재가 과거의 집적이라면, 그런데 그 과거가 계속해서 변한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  우리는 스스로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 것일까?
-  “시간적 왜곡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하며, 현재를 당연시해서는 안된다"

*  [과거와 현재 사이의 복잡/모호한 관계]와 [시간이 만들어내는 변형과 장난]을 바탕으로 [시간을 탐색하기]
*  작업 재료(물건/물질)의 개념적 변화 + 물리적 변화  ⇒   ‘시간이 나타나는 방식_육화'
*  “[형태]와 [의미]가 끊임없이 변하는 [물리적 실체]의 형태로 경험했을 때 [시간]을 가장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  ”더이상 전체의 부분이 아니지만, 여전히 중력의 끌어당김에는 저항하는 것"

하드웨어/몸체/형식_지난한, 노동집약적인 작업 과정으로 작업을 제작한다. 그 과정으로 작업에 남은 내 몸/손의 흔적+재료에서 비롯한 암각화와 같은 인상(+@금속성 템페라 Metallic temepera)으로 시간을 육화하는 방식. 왜?
소프트웨어/화면 혹은 이미지/내용_상이한 이미지 뒤섞기, 중첩 Layering 으로 ‘시간적 어긋남' 만들어내기.  무엇을? 왜? (이미지 선택 및 동기의 문제)
무엇을-어떻게-왜...
땀흘려가며 지지체를 깎아 만들고, 그 위에 손수 닥죽을 겹겹이 쌓아 페인팅이 이루어질 바탕/종이를 만들고(우스갯소리 반 진심 반, 물아합일의 시간이라 칭할만큼 고된 과정이다), 건조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이미지를 그리고 레이어링해가며 또 그리고, 다시 그리고, 뒤섞어가며 또 그리고...그럴듯한 시간적 어긋남/얽히고설킴의 화면이 만들어졌다 싶으면 그림을 칼로 절개하여 지지체를 빼내어 속을 비우고, 재접합하고, 절개부위를 티 안나게 메꾸고 보수하고...지난한 시간의 육화와 속이 빈, 시간적 어긋남의 화면이 유기체에 가까운 어떤 것...왜?




[장소 Place]
-  <시간>과 <공간>은 <장소>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진다
* 장소  
-  표면적 외양 + 은유적/상징적 의미
-  인간 행위 벌어지는 무대, 특정 시대정신이 주입된 환경
-  널리 알려진 특정 의미 지닐수도, 그 장소에 친숙한 이들에게만 알려진 숨은 뜻 지닐수도
*  [장소]는 [시간]이라는 주제와 상호 교차함 (특히 기억/역사)
-  장소는 현실의 물질처럼 [사건 event]에 해당_장소가 필연적으로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
-  장소는 정체성/기억의 일부가 될 수 있다
*  [장소 place] = [위치 location]
-  아주 넓을 수도,작을 수도, 실제일 수도, 가상일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비非장소 nonplace 일 수도 있음_사이버스페이스)
-  ‘가능성, ‘가정', ‘환상' 이 일어나는 곳, ‘무언가가 일어나는 어떤 곳'
*  [장소]에는 [지각 perception]과 [인식 cognition]이 모두 작용
-장소를 정의하는 것은 무언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누가 여기에 속하는가?
-이곳은 누구의 장소인가?

가상이란 환상의 영역으로, 시간을 초월하는(a-temporal) 특징을 지닌다. 역사의 조건에서 해방되어 있기 때문.

*특정 사건이 ‘일어난다 take place’
우리가 ‘제자리에 있다 in place’, ‘제자리가 아니다 out of place’  ⇒  [사건 event]의 발생과 [장소 place]의 존재
* ”장소를 탐색하는 능력은 인간 생존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유목민들은 ‘위치'를 파악하는 데 관심 가졌을 것. 특정 지역에 정착해 오랜 세월 보낸 문명사회도 마찬가지 였을 것"
*장소는 ‘가치’를 지닌다
-  장소의 상징적 가치 = 심리적 의미의 축적
*  [공간 space] - [장소 place]의 사회적/심리적 측면
-  변화할 수 있으며, 새로운 거주자들이 장소를 점유하면서 재정의됨
-  같은 장소에 다수의 심리적 공간 동시 존재 가능
-  장소는 물리적으로 변화할 수 있듯이 문화적으로도 변화 가능
-  새로운 심리적 공간이 기존의 공간 대체/공존

[풍경화]와 [산수]

<(대부분의) 장소 place는 공간 space 속에 존재한다>
-  ‘실제 장소'  :  [공간]이라는 일상생활 경험 펼쳐지는 3차원의 장 안에 존재
*  [공간 space]은 -  자연적일 수도
                           -  부조처럼 납작할 수도
                           -  입체주의 조각(’형상’을 ‘구성’한 것)처럼 중량이 텅 빌 수도
                           -  ‘장소의 공간'은 비디오 슬라이드/빛의 영사 통해 상호 침투될수도
                           -  소리/냄새가 공간을 채우고/스며들 수도

*  2차원  매체에서의 공간 처리/재현 방식 :  환영적 방식(포토 리얼리즘/마술적 리얼리즘/자연주의 리얼리즘)  ~  도식적 처리, 추상
-  평면 회화(15C~19C 서구) 선 원근법/대기 원근법  :  ‘특정 시점'에서 관찰자가 움직이지 않을 때 보이는 풍경으로 물리적 공간 묘사(환영적 이미지)
* 20C 2차원 매체 대안적 공간 시스템  :  [한 작품 안에 물리적 공간 분절적으로 재현]
[분절적 재현 disjunctive representation]  :  동시 공존하는 다수 공간에 대한 다수 시점
- 조립된 환경의 단편 겹치기, Layering으로 특정 공간 특징 구축/해체하기

[지도 제작 기법/개념/이미지 도입하기]
-  ‘지도 작성법'  :  정보 층층이 겹쳐놓을 수 있고
-  고정된 단일 시점에 갇히지 않고 장소 기록 가능  (모든 ‘위치 location’은 동시에 존재)
-  ‘관찰자'는 지도 위 모든 점 위에서 같은 거리 유지한 채로 떠 있을 수 있음 (유유자적, 너무나도 시끄러운 세상 한발 물러선 채로 세상사를 관조하는 지도 제작자의 마음가짐...)
-  +@ GPS 위성 시스템 등의 신기술

우리는 길을 잃었는가?  그들이 길을 잃었는가?  작가가 길을 잃은 것인가?

*  조각/설치 등 3차원 매체에서의 공간 표현
-  작가의 공간 흐름 조정, 그에 따른 관객의 공간 속으로의 빠져듦
-  회화/부조를 볼 때 변함없이 정면 시점이 지배적인 것과는 달리, 3차원 매체에서 ‘시점'은 어느 것도 절대적일 수 없다

>>부피를 부여받아 3차원의 영역에 들어선 그림은 어떻게 감상할 수 있는가. 어느 시점도 관람의 절대적인 시점이 아니다. 각도마다 다르게 보인다. 관객으로 하여금 선택의 문제를 부여하는 것. 페인팅을 하는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굳이굳이 입체 형태에 환영적 이미지를 그려넣는 것은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필연적으로 왜곡(보는 각도에 따라)을 수반할 수 밖에 없는 그림. 보는 방식(시지각이 지닌 한계는 물론이거니와)-나아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를테면 “사람은 보고싶은 대로 본다/“보고 싶은 것만 본다_선택적 인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_확증편향”따위의 것들에 태클을 걸고자 함인가. 청개구리와 같은 심보로 세계관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_분명한 것을 분명하지 않게 만들어 제시하는 것인가. 이또한 견강부회(牽强附會)의, 그럴듯한 근거들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내 작업에 그럴듯한 당위를 덧씌우는 것으로 치부되고 말 것인가.
“당신이 눈으로 직접 사물을 볼 때처럼, ‘보는 것'은 여전히 ‘믿는 것'인가? 아니면 ‘표면'은 그 아래 내재된 것에 비하면 거짓일 뿐인가?”
“진실은 사물의 외양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생각과, 진실은 내부구조나 몸의 시스템처럼 표면 이외의 장소에 숨겨져 있다는 반대 의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상태"

* 미술 작품은 [장소]안에 존재한다
*  [전시의 맥락]과 무관하게 감상 할 수 있는 미술은 없다
*  [보는 맥락]이 [의미]에 영향을 미친다
[장소 특정성 site-specificity]  -  <작품이 어떻게 보이는가>  +  <무엇을 의미하는가>  -  <작품이 놓이는 공간 배치>
-  ‘공간’의 구성 요소는 무수히 많다. 어떤 것도 가능 (공간의 크기, 일반적 특성, 구성하는 재료, 과거맥락의 활용, 역사적/정치적 중요 사건에서의 역할...)
자연적인 것은 무엇인가?  누가/무엇이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떤 것이 만들어진 것인가를 조종하는가?

*  [설치]는 관객을 ‘어떤 위치’에 ‘설정’하고 ‘개입’시키는 ‘구축된 환경'으로서 존재
-  우리가 ‘실제 장소'와 맞닥뜨리는 ‘마주침'을 증폭한 것
-  ‘환경 전체'를 미술 작품으로 탈바꿈 시키기
⇒  감정적/지적인 체험을 수밚하는 ‘신체 경험' 제공하는 것
⇒  관객이 연극 무대로 걸어 들어가, 자신이 익명의 퍼포먼스 상상하도록 요청받고 있음을 깨닫는것

[장소 바라보기]
-  ‘장소'의 촉각적/심리적 특질은 작품 내에서 서로 영향을 미친다
-  [장소를 바라보는 행위]는 사회적 관념에 의해 걸러진다
* [땅 land]은 자연적 현상/[풍경 landscape]는 문화적 구성체
* ‘장소'는 우리 ‘사고’와는 ‘독립된 바깥'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장소를 조직/해석하는 ‘개념'은 인간 사고의 발명/개입
‘기억된 장소의 이미지'    개인적 기억/잊힌 감정을 환기시키는 장소의 힘
‘실제 세계'x, 그것을 모방한 사진에 근거한 작품에서 ‘실제 장소'의 일차적 제거    작품의 주제_해당 장소x, 사진에서 드러나는 시각적 정보    ‘장소의 실제성'  또 한번 제거됨

* [장소]는 그곳에서 발견되는 [행동 패턴]으로 정의되기도_주변 사물과 연결되어  
 [도로 위의 자동차들, 교통 표지판_느림/가속/정지]-[신호등과 횡단보도_기다림]    [시간]을 직면하여 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 (시간 앞에 인간은 항상 무력할 수 밖에, 거스르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무용할 것, 트롤리 딜레마)
 행동 패턴에 근거한 [장소_시간+공간]의 메타포..._OO에게 한없이 불확실함을 부여하며, 동시에 어찌 할 도리도 없이 이미 결정된 채로 다가오는 것들. 앞엔 모든 것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 것.

*  오늘날 도시 =  인간 활동이 벌어지는 일차적인 장
*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장소를 반영하는 것처럼, 장소 또한 그 속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정의된다.”
[실제 장소/만들어진 장소]
- ’실제로 존재하는’ ‘만들어진 환경’ synthetic environment
-  가상, 실제 뒤섞인 작가들의 상상으로 꾸며낸 ‘환상의 세계'
 실제/가상, 자연/문화를 가르는 거짓된 이분법에 어떻게 도전하고 표현하는가
 두 영역 뒤섞인 혼성 공간을 어떻게 탐험하는가
* 장소에 대한 모든 예술적 재현(자연 풍경을 그린 것이라도)은 사회적 구조에 근거한 개념적인 함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합성 환경-디오라마 diorama]  [구축된 장소의 인공성]
* [새롭게 고안된 환경에 대한 탐색]
  관객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 하는 것
 특정 장소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재현하는 환경'은 ‘물리적 실존'과는 다른 어딘가, ‘실제로는 어디에도 없는 어딘가'
[장소 없는 공간 placeless space]  -  고정된 지리적 위치 없는 장소의 네트워크
[구조] -  [액체 건축 liquid architecture]_자체 변화하거나 다수로 확장하는 공간_비非유클리드 공간 non-Euclidean space의 차원

[무엇이 공적이고, 무엇이 사적인가]
-  사적 공간(영역)/공적 공간(영역)의 경계   흐려짐
                                                            ⇒  통제력 상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이제는 절대항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사적/공적 구분에 대한 관점 변화] - [점유하는 장소] - [그곳에서의 행동 양식] 이들 간 어떤 영향관계가 작용하는가
[공간의 사회화]
[다층적 행위 layered behavior]_’공적인 행동'과 ‘사적인 행동'의 공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다수의 행동 규범. 공적인 자아 + 사적인 자아의 모순 없는 병행

*[집]은 전형적인 사적 공간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프라이버시는 긍정적/부정적 함의 모두 가진다.
- 보안, 안전의 제공
- 동시에 외부의 가능성, 기회로부터 차단되고 규칙에 종속된 감금의 장소
[사이 장소]
장소/지역/집/거주 ⇔ 장소 없음/전치 dislocation/집 없음/방랑
[비장소 nonplace]  =  한 장소 → 다른 장소로 가기 위한 통과로서의 중간 지점이자 세계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형태를 한 지역적 특색 거세된 장소 
 ‘통과 transmit’의 장소, 익명성 + 자기 충족적, 기묘하게 친숙한 느낌 불러일으킴(특수성x)
*[남겨진 장소_거기]와 [채택된 장소_여기]
[변위 displacement]
-  사람, 자본, 디지털 정보, 생태학적 흐름이 지역/국가의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오늘날의 이동
-  ‘변위' 맥락에서의 ‘여행' = 상이한 언어/관습/물질 문화/사상 지닌 장소들 ‘사이를 통과하는 것'_<사이 in-betweenness>의 상태

*’실제 경험'이 어떻게 ‘장소'라는 감각에 고정되는가
*일어나는 ‘사건’이 평범한 것이든 신비하고 극적인 것이든,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경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형성/특징 짓는다
*’공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_신체적/정서적 특수성
[공간의 생산]  =  [하부 구조_사물의 물리적/경제적 생산_물리적 공간화]  +  [상부 구조_지식/제도/관념/표상 등 정신적 생산물_심리적 공간(언론이 만들어내는 도시 이미지, 공동체, 국가에 대한 생각 등 사회가 만들어 내는 것)]



[시각 예술]  =  [추상적 상징] + [재현 기호]의 [의사소통 형식]
언어(텍스트)  :  ‘의미 생산'의 동업자로서 작품에 개입
<언어는 의미를 만든다>_의미 표현 위한 언어 이용 8방식
-언어는 ‘기호'로 작용
-내러티브를 이야기 하거나 암시 가능
-은유의 기능(의미의 결합/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언어는 언어의 구조 자체를 해독할 수 있다
-제목, 캡션의 역할
-형식적 특징 때문에 도입될 수 있다
-사회/정치적 논평을 제공할 수 있다
-대화나 텍스트를 포함하는 인터렉티브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가 단어들을 숨겨진 의미로 환원할 때까지 언어는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더 많다.”
*언어의 ‘투명성 transparency’    시각적 + 언어적 작용 (작품 내에서)
                                               ⇒  언어적 강조와 시각적 강조 사이의 균형/변동
                                               ⇒  작품 내에서 언어(단어/글자)가 구체적인 시각적 현존을 가지게 됨
                                               ⇒  언어의 ‘물질적 특질'은 언어가 문법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거나 수정하면서 ‘의미의 또다른 운반체'가 됨
                                               ⇒  ‘읽히기도 하는 동시에 의식적으로 보이는 것'
                                               ⇒  ‘읽기'와 ‘보기' 사이의 왕복

*언어의 ‘불투명성 opacity’    언어/텍스트가 오로지 시각적인 차원에서만 작용하는 것(이때 텍스트=다른 시각 요소처럼 모양/재질/색깔로 ‘보이는 대상')
                                         ⇒  (외국어 신문 볼때처럼)텍스트=의미 없는 형태의 패턴
                                         ⇒  의미의 운반체x, 물질적 재료로써의 측면 
                                         ⇒  “언어의 의미론적 기능이 유보되고 간과된 감각적 측면이 전면에 대두됨에 따라 ‘관객'은 ‘의미의 바깥'에 놓이게 됨"

크레올화 creolilzation  ≠  hybridization의 혼성화
 서로 다른 두 분야가 상호작용해 새로운 혼성 영역 만들어 내는 것
 혼성적인 것 만들거나 사고하는 방식 (특히 옛것 +새것의 혼합)



[인간이라는 조건 자체]    영적인 것 탐색/우리의 존재와 사후의 삶에 대해 의문 품게 만드는 듯  ⇒  우리는 우리 자신과 주변 세상의 연관에 대해 숙고하며, 설명할 수 없어 보이는 경험에 대해 검토한다
우리는 ‘포스트 post’시대에 산다. 현재 상태는 과거의 세계관으로부터 멀어지는 과도기로, 미래는 아직 성문화되지 않았고 ‘경계'는 모호하고 성글다    경계적 liminal
<바티나스 vatinas>라는 주제는 삶의 근본적인 긴장 중 하나인 세속적 쾌락, 성취의 즐거움, 그리고 필연적인 소멸에 대한 인식 사이의 갈등에 대한 것
[자기 소멸 self-annihilation]  =  초월과 자유를 얻는 수단
변화, 극적인 결말, 관객의 조우(로 말미암아 맺는 관계)
모티프-매체의 관계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존재의 본성을 결정하는 우리 자신의 ‘유한성’ 인지하는 것. [시간]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비디오]라는 재료는 매체 속성상 일시적인 존재의 허무함을 내재함
이미지는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존재한다. 그리고 스위치가 꺼지면 사라진다.



1. 나는 그린다 - 고로 존재한다
2. 나는 존재한다 - 고로 사라질 것이다
3. 나는 사라진다 - 고로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평면적으로(진부하게) 바라보는 것 아닌 불안정하고 소멸하며 파괴적인 것에서 그 가치를 발견하는 것



Can a person be Way Too Human? What does being too human really mean? Too Much? Too emotional? Too weird? Too woke? Too being pissed on by a horse?
사람이 너무 인간적일 수 있을까? 너무 인간적이라는 건 정말 무슨 뜻일까? 너무 지나친 걸까? 너무 감정적인 걸까? 너무 이상한 걸까? 너무 정신이 나간 걸까? 말에게 너무 심하게 오줌을 누는 걸까?
I’m so hungry, I dream of foods that don’t exist
It is better to burn out than slowly fade away.



OO은 우상 숭배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OO은 하나님만을 경배하므로. 혹은 OO의 이미지는 단지 상징적 형태일 뿐이며, OO은 단순한 이미지를 숭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한 계몽된 현대적 주체이므로. OO은 응징당해야 할 우상숭배자들이며 그들의 우상은 파괴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OO은 우상숭배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일 OO이 OO중 하나라면, OO은 분명 우상숭배자이다. 만일 OO이 OO중 하나라면, OO은 우상숭배자가 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상숭배의 대가는 죽음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OO중에서는 그 누구도 우상이나 우상숭배자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 
OO은 무엇을 원하는가?
지속적으로 기술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들과 ‘자동제어장치'로서 관계 맺기
언어 너머의 심연, 시각 언어로써 우리를 되돌아보는 것
물질적인 동시에 가상적 육체를 전시하는 것
사람들은 모두 자기 어머니의 사진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훼손/파괴하는 것에 주저하는, 기꺼이 특별한 예외를 둔다.
투명인간은 실상 너무 지나치게 잘 보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_지나치게 잘 보이는hypervisible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

1. 보여지고 싶다
2. 보여지고 싶지 않다.
3. 보여지는 것에 관심 없다.

다시, OO은 무엇을 원하는가?
OO이 원하는 것=단지 OO이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는 것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가
-무엇을 생략하고 있는가
-그 지워진 영역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지점은 무엇인가
-일그러지고 흐릿한 것은 무엇인가
-그 테두리/경계가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재현의 각도가 우리에게 보지 못하게 만들고, OO이 보여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는 이로 하여금 엿보기를 들킨 관음증자로 만드는 동시에, 치명적인 눈을 지닌 메두사로 만드는 것
살아 있는 것=죽을 수 있는 어떤 것
살아 있는living 죽은dead
생명 없는inanimate 죽지 않은undead
과도기 대상transitional object 은 버려진다 해도 잊히지도, 애도되지도 않는다. 장난감, 학습기계 따위의 사랑이자 학대 대상 또는 무시 대상. 그저 보내기letting go 가 초점이 될 뿐인 것.

Thirst is everything. It’s the real thing.
어떤 모습의 떠오름Dawning of an aspect_’이것’을 ‘저것'으로 보는 새로운 방식
발견된 대상, 불쾌한objectional 대상, 실물 교훈object lesson
비천한abject 대상, 불쾌한 이미지의 산물들
주운 아이Foundling
테무나Temunah_어떤 대상의 형식/외적 형태
미끄러운 비탈길Slippery slope 원칙
속아넘어간baboozled 타협 형성물compromise formation
큰 희생을 요구하는 신이자, 사람이자, 사물인 몰록Moloch은 어린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한다.

보이지 않고 보기Seeing without being seen
바다에 가설적 그물을 던져 무엇이 걸려드는지 살펴보는 것
‘인간 육체'란 더이상 없다. 성별화된 육체, 욕망하는 육체, 인종화된 육체, 의학적 육체, 조각된 육체, 과학기술적 육체, 고통/쾌락을 느끼는 육체만이 있을 뿐.
인간 육체는 무한히 변형 가능한 보철물/장기의 조합처럼 보이게 되었고, 포스트 휴먼 감수성, 사이보그의 의식을 표현하게 되었다.

‘어둠의 구현'으로 부재/음화 흔적/공백으로 지시, 제시하는 것
비어있음으로 인해 배가되는, 환기되는 내적공간inscape, 내면의 공간
상호적 탈위치
[형상-배경-관객]의 관계
‘국가'란 상상된 공동체로써, 이미지/담론/볼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일체가 결합된 문화적 구성물이다



OO은 진실로 모든 곳에 있으나 아무곳에도 없다
OO은 길 위에, 차 안에, 가고 오고 멈춰서며 있다
어떤 지점도 다른 지점과 아무런 매개 없이, 페이지만 넘기면 닿을 수 있고 OO의 그 어떤 측면도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 공간/시간상의 직선적 이동경로와 아무런 관계 없는 이접적인 배열
어디에나 있고 유령처럼 그것을 지나쳐 가는 것
반쯤만 살아 있는 언캐니한 시체,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의 형상들에 쫒기는 것
똑바로 살아라 Do the Right Thing
흑인이 흑인으로 분장을 하는 것
디지털 시대는 컴퓨터/인터넷에 의해 직접적인 기술방식으로 기술적으로 결정되기는 커녕, 육체적/아날로그적/비 디지털적인 새로운 형태의 경험들을 양산하고 있다
시원적 시간deep time의 관점에서 우리의 조건 다시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가,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

시각vision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는다
보기seeing가 무엇인지 볼see수 없다
보기 자체를 보여주는 것
보기 를 전시하는 것
보기를 보여주기showing seeing

만질 수 있는 것the tactile
촉각적인 것the haptic
간과된 것the overlooked
보지 못한 것the unseen
공감각
청각적인것
맹목blindness
보이지 않는 것the invisible
볼 수 없는 것the unseeable



아무리 헤집어도 늘 빈칸 뿐인 시간을 채우는 것
지는 노을은 외로운 기러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물빛은 높은 하늘과 같은 색이다.



지평선은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지평선으로 보이는 그 아득한 지점에는 그런 선이 없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선이다.
어떠한 교훈도 없고 극적인  긴장도 반전도 결론도 없는,순수하게 공허를 채우기 위한 이야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끝없는 기다림의이야기

하늘을 그린다는 것=허공 위에 또 하나의 허공을 겹쳐놓는 일. 결국 구름, 새, 비행기, 지평선 같이 하늘 아닌 것들을 그려놓고 하늘을 그렸다고 말 할 수 밖에.
끊임없이 ‘어제'를 버리고 그 빈자리에 ‘내일'을 채워 넣는 것. 습관/취향/신념/기억까지. 짐이 될 만한 무엇이든 포기하는 것.
그 이전에, ‘오늘'은? 내일이라 칭하는 것. 당연히 당도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 그것 이전의 오늘. ‘오늘’,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이 있다. 연속적-직선적-종적-선형의 흐름인듯 보이는 체계의 것. 만들어진 것.
일순간 붕괴될 가능성을 내재한 체계 속, 미세한/불확실한/불분명한/지표를 알 수 없는 파편들로써 ‘지금 이 순간'만이 있다.
직전의 시간/순간. 지금 이 순간:항상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기 직전의 순간.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 막 일어나려 하거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태. 우리는 아직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은 시간 속에 있다. 한가지 일이 끝나는 듯, 곧바로 또다른 일. 이런 상태의 끝없는 반복. 현실의 삶에 영화같은 끝은 없다.
만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허공에 던져진 채 바닥 없는 곳에 끝없이 추락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공회전의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



당신은 괜찮냐는 질문. 그리고, I am okay. 나는 괜찮아. 잘 지내니 나쁘지 않아. 아무 문제 없어. 잘 되고 있어. 걱정할 것 없어. 그러니 날 좀 내버려 둬.  세상은 문제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나는 괜찮아. 아무일 없이 잘 지내. 당신의 배려는 고맙지만 받고 싶지 않아.의 거부/단절의 의지, 의사표명

육신이 갖고 있는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시켜 잡념이 끼어들 여지를 없애는 것.



가리고-숨기고-드러내는 것
천장/바닥. 안/밖/속/틈새. 지상/지하/허공. 공간/형태/부피/장소/환경. 앞/뒤. 이면/내면/표면. 시간/공간.
죽은 것/산 것/생명 없는 것/만들어진 것.
뜨거운 것/차가운 것.
지워진 것/가려진 것/덮힌 것/흐려진 것/뭉개진 것.
봄/여름/가을/겨울
모든 것
아무것도 아닌 것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
무엇이건 갖다 붙일 수 있는 것



학문을 하는데 세 가지 여가(三餘)만 있으면 충분하다.
後者日之餘
밤은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고,
冬者歲之餘
겨울은 일 년의 나머지이며,
陰雨者時之餘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은 맑게 갠 날의 나머지이다.

畵者工之餘  詩者睡之餘  生者劫之餘
(화자공지여 시자수지여 생자겁지여)

그림은 솜씨의 나머지요
시는 졸음의 나머지이며
삶은 영겁의 나머지라
-三餘,제백석-



All in all is all we are모든 존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다
Jesus doesn’t want me for a sunbeam. With the lights out. Married/Buried. I feel as one. And always will until the end. What else should I do. It’s fun to pretend. Be here now. Eternal sunshine with a spotted mind. CLEAN깨끗함. SERENE고요함. SOBER선명함. 슴슴하게 여기 있기. 아지랑이. Sometimes the silence is all we know. I’m just a fucked up OO trying to find peace of mind. What am I now. What arme YoIu. Who arme Yolu. Live a little. Breakable heaven. Be in the middle of nowhere. 커튼뒤에서. 어찌 할 줄 모름. 어디로 갈 지 모름. 무저갱. ILL HV HL. 그런게 있어요. Endless/Nameless. 내일,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내일. Electric sansevieria. The existentional Trolley dillema. Hermeneutic Trolley dillema. Newcomb’s Trolley problem. Cutting-edge paper ship of Theseus. 무기징역 2년. 한달연봉 3억. Still, life. 네모난 동그라미. 중력을 거스르는 물방울. We---ee ha----------ppy fee--e---ew. A different kind of nothing
시각언어를 다루는 자에게 있어, 흡연이라는 행위는 자신의 호흡에서부터 한숨까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과정 일체를 스스로 시각화해서 보는 것과 같다.
두려움=우리가 딛고 서있는 바닥. 넘지 못하는 국경. 우리의 운명.
‘두려움을 다루는 일’
기념비=삶이 아무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버려지는/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
OO이 하는 일=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을 다루는 일.분명한 이름으로/말로/언어로 분류, 구분, 설명할 수 없기에 그저 그 앞에서는 침묵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만드는 것



-침묵=말을 하는 다른방법
-말=소리를 지르는 다른 방법
-노래=소리 내어 우는 방법
-시=비명을 지르는 다른 방법
-조각=유리병 속의 편지



三界の狂人は狂わせることを知らず。
삼계의 광인은 미친 것을 모른다.
四生の盲者は盲なることを識らず。
사생의 맹인은 눈이 먼 것을 알지 못한다.
生まれ生まれ生まれ生まれて生の始めに暗く、
우리는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도 삶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死に死に死に死んで死の終りに冥し。
죽고 죽고 죽고 죽어도 죽음의 끝을 알지 못하리라.